미국 대법원이 임신중지(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면서 남성용 피임약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남성용 먹는 피임약은 기존 피임법보다 효과적인 데다 남성의 참여율도 높일 수 있어 임신중지가 어려워진 시기에 남녀가 함께 피임에 책임을 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남성용 피임약 시장도 앞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에서 연간 보고되는 약 600만 건의 임신 중 40%(240만 건)가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며, 이 중 20%(48만 건)는 임신중지가 이뤄지는 것으로 집계됐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미 대법원의 결정으로 매년 수십 만 명에 달하는 임산부가 병원에서 안전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길이 없어진 셈이다.
NYT는 “미국 내에선 계획되지 않은 임신을 예방하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특히 남성이 피임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의 경우 먹는 피임약과 △자궁 내 장치(루프) △여성용 콘돔 △질 살정제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지만 남성은 콘돔과 정관 절제술 정도가 전부다. 남성이 임신에 전적으로 관여하고 평생 가임 능력이 있음에도, 임신에 대한 책임은 여성에게 전적으로 강요된 셈이다. 그런데 콘돔의 피임 실패율은 15% 정도로 높고, 정관 절제술의 경우 한 번 받으면 회복이 불가능한 영구적 피임 방법이어서 이마저도 남성들에게 기피돼왔다.
이 때문에 남성용 피임약 도입이 계획되지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한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남성용 피임약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인 편이지만 효과도 월등하다.
미국 비영리재단인 남성피임이니셔티브(MC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과거에 원치 않는 임신을 경험했던 18~44세 미국 남성의 82%가 피임약을 복용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앞서 미국 미네소타대 연구팀은 올 5월 쥐를 이용한 남성 경구용 피임약 실험에서 부작용 없이 99%의 임신 예방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여성 경구용 피임약의 임신 예방률과 비슷하고 콘돔보다는 상당히 높다.
남성 경구용 피임약은 체내에 흡수돼 정자 수를 크게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투약을 중지하면 4~6주 후에는 생식 기능이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먹는 대신 매일 어깨와 팔에 조금씩 바르는 젤 형태의 남성용 피임약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NYT는 “여성용 피임약은 호르몬을 사용해 월경주기를 방해하는 방식으로 체중 증가와 우울증, 심장질환 위험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동반된다”며 “남성용 피임약이 출시되면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큰 여성용 피임약 사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남성용 피임약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지 못해 현재 판매되는 제품은 없다. 임상실험을 진행한 쥐에서 특별한 부작용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사람에게 똑같은 효과를 보이면서도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까지 검증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려서다.
그러나 미 대법원 판결로 임신중지가 어렵게 된 상황에서 남성용 피임약에 대한 시판이 서둘러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NYT는 “지금껏 남성 피임약 개발을 위한 업계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제는 남성용 피임약 사용에 대한 교육 등을 통해 해당 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