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흥행을 지켜보며 가슴 깊이 '국뽕'이 차오른 적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손흥민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골든부트를 거머쥐었을 때도,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단지 국적만 같을 뿐인데 이들의 성과가 내 일인 것마냥 뿌듯했음을 고백한다. 식민 지배의 아픔과 약소국의 설움이 대대손손 DNA에 새겨진 탓인데 어쩌겠나. 못 견디게 촌스러워도 타국인의 환호와 인정에 괜히 으쓱해지는 토종 한국인인데.
애국주의가 지나치면 국수주의로 흐르기 쉽다고 했다. 역사상 문화적 자부심이 가장 고취돼 있는 시기. 경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사 제목에 습관처럼 'K' 따위 달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안일함과 창의력 부족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잇따른 성공 이후 해외 기업이 한국 콘텐츠에 투자를 늘리겠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더욱더. 'K콘텐츠의 시대'라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악명 높은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도 자연스레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스태프의 근로 실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근로계약서도 안 쓰는 곳이 태반이다", "15시간씩 4일 연속 찍는다", "연기자만 돈을 번다" 등의 토로를 쏟아냈다. 조수급, 감독급을 가리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비슷했다.
30년 경력의 동시녹음 감독은 말했다. "넷플릭스도 한국이 저임금으로 빨리, 잘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미국에서 1,000억 원에 만들 것을 여기선 500억 원이면 되니까 좋아하는 거죠." 한국이 '싸게 잘 찍는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의 총 제작비는 약 253억 원으로, 회당 28억 원 정도다.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기묘한 이야기(회당 약 95억 원)', '더 크라운(회당 약 119억 원)'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제작사 수가 늘어나고 이들끼리 경쟁하면서, 덤핑하듯이 '더 싸게 찍을 수 있다'고 나서는 경우도 흔하다고 했다.
고효율 달성을 위한 저비용의 고통은 스태프에게 전가되기 일쑤다. 드라마 스태프는 임금을 대부분 일당으로 받는다. 월급제와 달리 일당제하에선 짧은 기간 많이 촬영할수록 이득이다. 대다수 제작 현장이 주 52시간을 위반하며 하루 15시간씩, 주 4일간 찍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당제와 장시간 노동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인 셈이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주 12시간의 연장 근로를 주 단위가 아니라 월 단위로 산정하겠다고 밝히자, 당장 "제작사들이 주 4일에서 주 3일로, 더 몰아서 찍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법을 지키면서 얼마든지 드라마를 찍을 수 있다"고 했다. 하루에 2시간씩만 단축해, 식사 시간 포함 13시간씩 주 4일만 찍어도 일단 주 52시간 안에 들어온다. 돈 아끼려고 안 할 뿐이다. OTT를 타고, 전 세계의 콘텐츠가 경쟁하는 시대. 애국 시민으로서 말하건대, 이대로 한국이 가성비 좋은 '세계의 콘텐츠 공장'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가성비는 떨어지더라도 그저 '제값' 하는 콘텐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땐 정말 마음 편히 국뽕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