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정은채)는 늘 해맑게 안하무인이다. "아 맞다 유미(수지)야, 내 눈에 띄지 말고 계단으로 다녀 계단".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에서 현주가 이렇게 말한 뒤 환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유미(수지)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한동안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유미의 집은 23층이다.
7일 서울 삼청동 소재 카페에서 만난 정은채는 "우리는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유미가 어떻게 갑자기 신분 상승을 했든 현주는 알고 싶지도 않을 거다. 현주가 처음에 유미를 비서로 만났고, 시작부터 갑과 을의 관계였으니까"라고 말했다. 극 중 현주를 이렇게 해석한 정은채는 이 대사를 할 때 오른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튕긴다. '갑질'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캐릭터의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넣은 애드리브였다. 정은채는 '안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 외동딸 현주를 낭창하게 연기한다.
정은채와 '안나'와의 인연은 4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병헌 공효진 주연의 영화 '싱글라이더'(2016)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은 정은채를 직접 만난 뒤 현주 역에 살을 붙였다. 유학파 미대 출신이란 캐릭터의 배경도 영국에서 8년 동안 유학하며 유명 예술대학에 입학한 정은채의 실제 이력에서 따왔다.
정은채는 "보이는 것과 달리 제가 차갑고 완고한 사람은 아니다"라며 "느슨하고 해맑은 편인데 그런 면들을 캐릭터에 담아달라고 했다"고 제작 뒷얘기를 전했다. 그렇게 웃으며 날을 벼린 현주의 갑질은 아찔하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는데 만약 안 되는 게 있다면 혹시 돈이 부족해서 아닐까 생각해보자'란 말을 현주가 유미한테 해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그 대사, 무서웠어요. 현실에서 말이 안 되는 얘기만은 아니니까요." 드라마에서 현주의 영어 이름은 안나. 그의 이름과 학력을 몰래 훔쳐 산 유미와 현주가 얽히며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비극으로 치닫는다.
정은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배우다. 드라마 '리턴'(2018)에선 당당한 변호사를 연기했고 같은 해 방송된 '손 더 게스트'에선 냉철한 형사로 나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으로 얼굴을 알린 그는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2020)에서 강단 있는 총리를 연기했다. "다양한 모습으로 틀을 깨고 싶어" 한 선택이었다. 주체적이고 당찬 역을 주로 맡았던 그는 한국의 식민 역사를 다룬 '파친코' 시즌1(2022)에서 남편에게 충실한 재일교포 경희로 나온다. 정은채는 "길게 보면 경희의 성장을 보여줄 수 있고 일제 강점기에 난관을 어떻게든 뚫고 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출연 계기를 들려줬다.
정은채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2013년엔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을 냈고, 2018, 2019년엔 MBC 라디오 'FM 영화음악 정은채입니다'를 이끌었다. 라디오 DJ를 맡고 있다면 그가 청취자에게 요즘 소개하고 싶은 음악인은 누굴까. 정은채는 주저 없이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본명 미셸 자우너)'를 꼽았다. 활동명으로 일본계라 오해할 수 있지만, 이 여성 음악인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2월 국내에도 출간된 'H마트에서 울다'로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정은채는 "요즘 앨범 '주빌리'(2021)에 푹 빠져 있다"며 "아주 날아다니는 뮤지션"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