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으로 군인 1,000만 명 이상, 민간인은 1,300만 명 넘게 사망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빌헬름 2세는 법적 처벌 없이 네덜란드로 피신해 23년을 더 살았다. 제2차 대전은 반복된 비극이었으나 전후 처리는 달랐다.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소와 도쿄 극동군사재판소는 독일과 일본 전범들을 최초로 법정에 세워 단죄했다. 전쟁방지를 위한 유엔 출범에 이어 20세기 학살의 시대에 대한 반성은 국제형사재판소(ICC) 구성으로 이어졌다.
ICC는 전쟁범죄 등 국제법을 어긴 ‘개인’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상설 국제재판소다. 국가 간 분쟁을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 달리 전범처벌이 평화의 조건임을 강조한 결과다.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로버트 잭슨 미국 수석검사는 “국제법상 범죄는 구체적 개인에 의해 범해지며, 그를 처벌해야 국제법의 규범이 생명력을 갖는다”고 했다. 인류가 목격한 전쟁과 대량학살, 인종청소 등 비인도적 만행에 대한 성찰이 ICC인 셈이다.
정작 ICC가 출범한 것은 전후 반세기가 더 지나서였다. 1998년 7월 유엔총회에서 ICC설립을 위한 로마규정이 채택된 후 4년 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범했다. ICC가 관할권을 행사하는 4개 범죄는 집단살해, 반인도 범죄, 전쟁범죄 그리고 침략범죄다. 침략범죄는 그 정의와 관할권 행사조건 문제로 10년 넘는 논의 끝에 2018년 7월 관할권이 인정됐다.
전쟁을 불법적 무력행위로 규정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는 국제사법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ICC 출범으로 자위권 행사 이외 일체의 무력 위협과 사용은 위법이다. 국제사회 범죄자는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는 것도 국제 상식으로 정착됐다. 그렇다고 국제사회에서 전쟁이 멈춘 적은 없지만 크고 작은 국제 범죄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ICC는 다만 강제 집행력이 떨어지고 조사대상 역시 약소국, 아프리카 지역 분쟁들을 주로 다뤄 강대국에 약한 재판소란 지적을 받고 있다. ICC의 이런 한계는 강대국의 외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123개국이 비준했으나 미국을 비롯,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은 로마규정에 서명하지 않거나 비준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살아 있는 권력을 단죄하지 못하고, 주요 수사대상이 약소국에 몰리는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
미국만 해도 로마규정까지 서명한 뒤 해외활동 제약을 이유로 비준하지 않고 있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서명철회를 선언했고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파투 벤수다 당시 수석검사 등의 자산동결, 입국거부 제재를 부과했다. ICC가 미군과 중앙정보국(CIA)의 아프가니스탄 내 전쟁범죄를 조사키로 한 데 반발이었다. 다만 ICC는 최근 들어 민감한 사안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미군 조사에 이어 이스라엘의 점령지 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쟁범죄 조사,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에 대한 민간인 살해 조사 등이 좋은 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ICC는 다자무대에서 한국이 위상을 높인 국제기구 중 하나다. 이름을 올린 재판관만 해도 3명인데 송상현 전 재판관은 소장까지 지냈고 권오곤 전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재판관은 ICC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사국총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현직 18명 재판관 중에는 정창호 재판관이 있다.
정부는 이행법률인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국제형사범죄법)도 제정해 시행 중이다. ICC는 탈북민 등의 탄원에 따라 북측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의 전쟁범죄를 조사했으나 의도적인 민간인 공격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며 예비조사를 종결했다.
최근 ICC의 우크라이나 전쟁범죄 조사개시 요청에는 일본만 아시아에서 참여했다. 우리 외교부는 3월 당시 “ICC 공동 회부와 관련한 요청을 받은 바 없다”고 했으나 4개월이 지난 지금도 한국은 ICC가 공개한 43개 찬성국에서 빠져 있다. 당시 정부가 대러 관계를 감안해 불참한 것으로 추정되나 국제사회 현안에 대한 원칙 훼손이란 지적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