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의식한 에너지 안보 차원과 '2050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신규 원전에 관심이 상당했다. 방산 분야는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자국의 국방을 강화하고 방위산업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국가들이 많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 일정을 마치고 스페인에서 귀국하는 전용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재진에게 참가국 정상들을 상대로 '세일즈 외교'를 펼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윤 대통령은 사흘 출장 기간(6월 28~30일) 8개국 정상과 개별 회담을 갖고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당부했다. 폴란드엔 원전·신공항 건설, 덴마크엔 해상풍력, 호주·캐나다엔 희귀광물 등 협력 요청 분야도 구체적이었다.
이런 열정적 행보엔 유럽 시장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활로라는 야심찬 선언이 뒤따랐다. 대통령실은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며 "중국의 대안이 될 시장 다변화, 새로운 주력산업 발굴, 경제안보 협력 확대, 이 세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하는 지역이 바로 유럽"이라고 설명했다. 원전과 방산으로 시작해 향후 첨단사업 공급망 강화, 미래 성장산업 협력 기반 구축으로 나아가겠다는 대(對)유럽 세일즈 외교 로드맵도 제시됐다.
동남아, 중남미 같은 신흥 시장 대신 유럽을 '기회의 땅'으로 지목한 윤석열 정부의 역발상에선 순발력이 느껴진다. 원전·방산 분야에서 유럽 시장 확장세는 괄목할 만하다. 당장 내년에 폴란드와 체코가 신규 원전 건설 사업자를 선정한다. 역내 최대 원전 보유국인 프랑스는 탈원전 기조를 뒤집고 대규모 증설 계획을 밝혀 시장에 훈풍을 불어넣었다. 방산 분야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각국이 앞다퉈 방위비 증액에 나서면서 탄력을 받았다. 정부가 방산 수출에 특히 공들이고 있는 폴란드는 내년 국방 예산을 GDP의 3%로 늘려 증병과 장비 현대화에 투입할 참이다.
하지만 유럽의 현실이 우리 정부의 장밋빛 전망에 부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단 유럽 경제의 후퇴 조짐이 심상치 않다. 역내 최대 경제국이자 통상강국 독일은 지난 5월 31년 만에 무역수지 적자를 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제재하려다가 에너지 가격 급등, 교역 경색의 후폭풍에 직면한 유럽 상황의 단면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를 넘기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올해 성장률이 1% 언저리까지 하락하리란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유럽 군비 증강을 추동하는 나토의 결집력이 계속 유지될지도 미지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나토는 뇌사에 빠졌다"며 무용론을 제기한 게 불과 3년 전 일이라며, 나토 규합의 결정적 요인은 본국의 아·태 전략을 염두에 둔 미국 정부의 의지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경제난이 심화하면서 나토 회원국 내부에 전쟁 간여를 비판하는 여론이 급증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국민 88%가 "정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성토하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은 이제 재선을 장담하기 힘든 지경이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다른 요인까지 겹쳐 내각이 흔들리고 있다.
유럽 각국이 정치·경제적 압력에 굴복해 내정부터 챙기는 정책으로 전환한다면 재정 지출 우선순위가 한국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재편될 공산이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는 그 가능성을 더욱 키울 것이다. 유럽 시장을 중국 시장의 대체재로 삼기엔 추이부터 신중히 살펴야 할 변수가 적지 않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가운데 대중국 비중은 25.3%, EU는 그 절반에 못 미치는 9.9%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