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회사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서에서 근무했던 여성 직장인 최문정(26·가명)씨. 그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같은 부서 부장에게서 "발표 전까지 다이어트 좀 하라"는 어이없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당황한 최씨는 "안 그래도 요즘 저녁엔 닭가슴살만 먹고 있다"고 멋쩍어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 그러나 부장은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부어 보이냐"면서 한 술 더 떴다.
참다못한 최씨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자 부장은 그제야 "물론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며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쾌감을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최씨는 6일 "이런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가 얼마 뒤 이직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당시 사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4년 차 여성 회계사 나진숙(29·가명)씨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고객 미팅을 할 때면 매번 "화장을 하라"는 상사 지시가 떨어졌다. 평소 치장엔 관심이 없던 나씨가 몇 달 전 우연히 화장을 하고 출근한 게 화근이었다. 상사는 "프로다워 보인다"고 칭찬했고, 계속 화장을 요구했다. 그는 "외모가 내 능력의 잣대가 된 것 같아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상사의 외모 품평이 성희롱이나 성차별로 이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서 2년 정도 근무한 여성 김선아(26·가명)씨는 매년 '입찰 시즌'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예쁘게 꾸민 여자가 발표를 해야 잘 붙는다"면서 상사들이 김씨에게 발표를 강요한 탓이다. 심지어 어떤 상사는 "나 같은 아저씨가 가면 심사위원이 쥐 잡듯 질문하는데 예쁜 여자가 발표하면 한결 부드러워지니 꼭 잘 꾸미고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또 몸에 딱 달라붙는 짧은 정장 치마를 입으라며 드레스코드까지 간섭했다.
외모 가꾸기를 강요받는 건 남성도 예외가 아니다. 6년 차 제약회사 영업사원 오강현(34·가명)씨는 오똑한 코를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필러를 맞는다. 오씨는 "직업 특성상 의사나 간호사, 원무과 직원을 주로 만나는데 상사들은 '이미지가 실적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소연했다. "평소 외모, 몸매 관리에 신경 쓰라"는 상사들의 핀잔이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만만찮은 비용도 고스란히 오씨 부담이다. 필러 시술뿐 아니라, 여드름 케어, 수염 제모 등의 관리는 물론 헬스장에서 개인 레슨도 받고 있다. 지금껏 쏟아부은 돈만 얼추 2,000만 원. 그는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다들 외모도 업무 경쟁력이라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상사들도 할 말은 있다. 이들이 부하 직원에게 외모 관리를 요구하는 명분은 '직원의 첫인상이 곧 회사 이미지'라는 믿음이다. 실적을 따내야 하는 영업사원이나 손님들을 직접 응대하는 서비스 직종이 더 그렇다. 대기업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임원까지 지낸 퇴직자 박모(56)씨는 "고객 입장에선 처음 만나는 영업사원을 통해 회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며 "호감을 얻기 위해 외모를 관리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3월 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봄맞이 대청소 기간 직원들에게 '단정한 복장, 화장 필수'라는 지침을 내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화장 필수'라는 문구가 빨간색으로 강조된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전문가들은 부하 직원에게 과도하게, 반복적으로 외모 관리와 꾸밈을 요구하는 일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근로기준법(제76조)에서 규정하는 '직장 내 괴롭힘' 성립 요건은 사용자나 노동자가 ①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하고 ②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를 하며 ③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나빠지게 했을 때 등이다.
윤지영 직장갑질 119 변호사는 "상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귀신 잡아먹은 것 같으니 화장 좀 잘해라' 같은 발언은 그 자체로 모욕성을 내포하고 있어 곧바로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피해를 당하면 먼저 사내 담당자에게 신고해야 한다. 신고 후 사내에서 상담 및 조사가 이뤄지고, 사안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재발방지약속, 사내 징계위원회 회부 등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회사가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 사업주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만약 회사 대표가 가해자라면 관할 고용노동청의 직접 조사도 가능하다.
앞선 김선아씨의 사례처럼 성적(性的) 의미가 내포된 외모 관리 요구는 성희롱 고소 등 형사사건으로 다뤄질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규정하는 성차별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만 외모 지적의 수위가 높지 않거나, 업무와 연관성이 명백하게 인정될 때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항의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런 사례는 훗날 신고에 대비해 자료를 축적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윤 변호사는 "외모 관리를 압박하는 상사 발언을 계속 녹취해 두면 불합리한 요구가 반복적으로 행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며 "업무 연관성이 있다고 해도 수위가 높을 경우 집단 건의문 등을 통해 근거를 남겨 놔야 나중에 신고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스스로 '이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문제 의식을 갖는 일도 중요하다. 최미숙 노무사는 "상사 발언이 부당하다는 자각이 우선이고, 윗사람에게도 잘못된 행태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거리낌 없이 하급자의 외모를 지적하는 사내 문화를 바꾸는 계기로 삼자는 의미다. 최 노무사는 "직장 내 모든 부당함을 법적 절차나 괴롭힘 신고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외모 품평을 들었을 때 그냥 넘어가지 말고, 조금이라도 불쾌한 티를 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장종수 직장갑질 119노무사는 "가령 주변에서 흔히 하고 듣는 '살 빼'라는 말은 큰 문제인데도 대부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피해자 관점에서 괴롭힘의 인정 범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 노무사 역시 "모든 외모 지적은 기본적으로 성적 맥락이 들어간 것"이라며 "우리 사회 전체의 성인지 감수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