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입력
2022.07.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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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이건 좀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일은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설치한 것이었다. 일자리만큼은 확실히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지만, 걱정이 됐다. 숫자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정부 정책의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 숫자와 함께 제시된 '성장률을 5%로 끌어올리겠다', '일자리를 100만 개 만들겠다'는 식의 목표는 막연하게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숫자로 명확하게 설정된 목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현황판의 숫자를 보면 누구나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참고해야 할 대상인 숫자가 목적이 돼 오히려 집착하기 쉽다. 실적을 위한 '속도전'까지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성적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21년 60.5%의 고용률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의 60.6%보다 떨어졌고, '비정규직 제로'의 구호가 무색하게도 비정규직 비율은 같은 기간 32.8%에서 38.4%로 높아졌다. 공공부문 81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111조 원의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양질의 일자리보다는 통계 수치를 위한 저임금·임시직 일자리만 늘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자리는 경제 성장 수준, 산업구조 재편, 노동시장 특성, 인구구조 등 다양하고 복잡한 변수의 영향을 받는데, 숫자를 통한 과도한 단순화에 매몰돼 '숫자놀음'에 빠진 탓이 크다고 본다.

5년 전의 일자리 현황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윤석열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인재 양성' 정책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인력 부족은 역대 정부가 모두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으면서도 섣불리 손대지 못했던 해묵은 과제였다. 새 정부가 뒤늦게나마 강력한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인 것엔 박수를 보내지만, 자칫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의 '숫자 늘리기'에만 집착할까봐 걱정된다.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니, 대학에서 반도체를 공부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면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지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반도체 산업은 설계, 제조, 조립, 장비, 재료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고, 전기·전자·기계·소재공학, 컴퓨터, 물리, 화학 등 수많은 학문과 연계돼 있다. 도대체 어떤 학생들을 '반도체 인재'로 분류해야 하는지도 애매하다. 산업계가 요구하는 인력도 고졸, 전문대졸, 학사, 석·박사급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 복잡한 문제를 반도체 학과 정원의 '숫자'로 단순화해 해결하려고 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학생 정원은 규제를 풀어 늘릴 수 있지만, 교수진과 시설·장비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국내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이 인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 대학이 이들과 경쟁해 유능한 교수를 모셔올 수 있을까.

이달 중 교육부가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을 발표한다고 한다. 부디 윤석열 정부는 숫자로 포장된 '깜짝 발표'로 장밋빛 가득한 목표를 제시한 뒤, 실적에만 집착하는 일은 피했으면 한다. 숫자의 유혹에 빠져 정책의 본질을 간과하면 국가 미래 산업이 흔들릴 수 있다.

한준규 정책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