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중국 아닌 분열국"… 대법원이 촉발한 '두 개의 미국'

입력
2022.07.03 11:00
"임신중지 둘러싼 분열, 노예제 폐지 갈등 연상" 지적도

임신중지(낙태)와 총기 규제 등 민감한 쟁점을 두고 연방대법원이 거침없는 ‘우클릭’에 나서면서 미국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진보·보수 성향의 주(州)가 서로 다른 목소리와 대응 방안을 내놓는 등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이면서 ‘두 개의 미국’으로 갈리고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2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대법원 결정들에 미국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며 ‘미 합중국(the United States)’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으로 부를 정도라고 평가했다.

보수가 확실한 우위를 점한 대법원은 지난 열흘 동안 임신중지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정부의 온실가스 규제 권한에 제동을 걸며, 진보 성향 주의 총기 휴대 규제를 차단하는 등 거침없이 힘을 과시했다.

그 중 가장 파급력이 큰 대법원의 임신중지 결정 직후 미국의 절반이 곧바로 임신중지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조치에 착수한 반면, 나머지 절반은 오히려 해당 권리를 강화하고 나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지도로 그려보면 북동부와 서부 해안으로 대표되는 진보 지역, 중부와 남동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 지역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구도다. 물론 보수 지역에 둘러싸인 진보 진영의 ‘섬’과 같은 일리노이주, 콜로라도주, 북동부에서도 보수 성향을 유지하는 뉴햄프셔주 등 예외는 있다. 지역 간 갈등뿐 아니라 같은 주 안에서도 도시와 시골 지역으로 진보, 보수가 갈라지는 현상도 자주 목격된다. 양측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성향과 맞는 지역으로 이주를 고민하는 미국인들도 적지 않다고 신문은 전했다.

임신중지 권한을 둘러싼 갈등은 과거 ‘노예제 폐지’ 과정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신중지를 금지한 주에 인접한 일리노이와 콜로라도가 수술을 원하는 여성들의 ‘피난처’를 자처한 것은, 과거 노예제에 반대했던 북부의 주들과 비슷하다고 임신중지권 옹호론자들은 보고 있다.

반면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그동안 이 권리를 인정한 1970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흑인의 시민권을 부정한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에 비유하면서, 오히려 대법원의 이번 결정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게 노예 해방과 같다고 주장한다.

진보 성향 주정부와 주의회는 연방대법원 결정과 상반되는 조치로 진보적 가치 수호에 주력하고 있다. 뉴욕주 상원이 전날 임신중지권과 피임권을 주 헌법에 명문화하는 조항을 통과시키고, 공공장소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버지니아주와 메인주 등이 탄소 배출을 규제하기 위한 방안을 공동 추진하고,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 주정부들도 ‘제로 배출’ 자동차와 청정연료 기준 수립을 위해 협업 중이다. 총기 문제의 경우도 워싱턴과 델라웨어주 등 11개주가 이번 주 일부 무기와 대용량 탄창 등을 금지한 반면, 텍사스주와 뉴햄프셔주는 총기 규제를 풀고 있다. 예일대 역사학자 데이비드 블라이트는 NYT에 “대법원이 분열을 초래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것인지 이제 막 보기 시작한 것”이라며 갈등 악화를 점쳤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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