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 ‘300억 원대 한일 공동기금 조성’이 비중 있게 검토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기업 등이 마련한 기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조만간 외교부 주도로 출범할 민관협력기구에서 해당 안을 포함한 다양한 해법이 논의될 예정인데,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은 불참할 가능성이 높아 ‘피해자 설득’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외교소식통은 29일 “이르면 다음 주 출범할 민관협력기구에서 한일 공동이 마련한 기금으로 피해자 1인에게 1억 원씩 지급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억 원은 2018년 10월 대법원이 전범기업에게 제시한 강제징용 피해자 1인당 배상 액수다. 배상금 대상은 최대 300여 명으로 기금 규모는 3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 같은 해법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2019년 12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일본 기업과 △1965년 한일 수교 과정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한국 기업(포스코 등) △양국 국민이 조성한 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문희상안’을 발의한 바 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피해자 설득이 관건인데 전범기업은 불참이 유력하다. 일본 정부는 우리 대법원 판결을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라고 보고 자국 기업들의 기금 출연을 반대해왔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하다. 외교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고육지책으로 기금 조성안을 내놓은 건 벼랑 끝에 선 한일관계의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라는 판단에서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최선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지만 기금 조성 외에는 피해자 그리고 일본 정부와 타협점을 찾을 만한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다. 양국 관계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대법원의 현금화 확정 판결이 당장 2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한국 진출 전범기업의 국내자산을 팔아 배상하라는 결정이 나와 강제집행이 시작된다면 한일 관계는 그야말로 파국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은 “국제사회에 '한국은 법이 안 통하는 나라'로 선전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기금 조성안이 불가피한 대안이지만 동시에 실행하기도 쉽지 않은 방안”이라며 “민관협력기구 등을 통해 정부와 피해자,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협의하면서 대안을 수정하고 보완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정부가 일본 기업에 대한 구상권 청구를 약속하는 등 피해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원덕 교수는 “정부가 일회성 조치로 문제를 매듭지으려 하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처럼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실현 가능성에 상관없이 구상권 청구를 하는 등 전범기업의 책임을 묻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