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라고 하니 솔깃할 수밖에 없죠."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SC제일은행 본점에서 만난 한모(70)씨의 말이다. 한씨는 기존 정기예금을 최신 상품으로 갈아타는 게 이익일지 알아보러 오랜만에 은행을 찾았다. "전에 연 1%대 후반 이율로 가입한 3년짜리 예금 만기가 1년 더 남았지만 금리 인상 뉴스가 자주 나오고 은행도 이자를 더 준다니까 마음이 기울었죠."
마침 이틀 전 SC제일은행은 최고 연이자 3.2%의 정기예금 상품(12개월 만기)을 출시했다. 수시입출금통장에 30만 원 이상 예치하고, 영업점을 찾아 1억 원 이상 정기예금을 들면 최고 금리를 받을 수 있다. 1억 원을 넣으면 1년 뒤 이자로 세후 270만7,200원이 더 생긴다. 최고 금리 3%에 100만 원에서 최대 5억 원까지 예치할 수 있는 비대면 상품(12개월 만기)도 나왔다.
이날 한씨는 상담만 받고 발걸음을 돌렸다. "금리가 더 오를 것이라고 하니 시간을 두고 더 좋은 상품을 찾아보려고요. 다음 달에 다시 은행에 올 겁니다." 그는 나름의 재테크 '작전'을 짠 것으로 만족했다.
금리 인상기를 맞아 예적금이 뜨고 있다. '빚투(빚내서 투자)'가 유행할 정도로 '한 방'을 노렸던 이들마저 안전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주식·가상화폐에 몰렸던 돈이 은행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역(逆)머니무브'란 이름도 붙었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듣던 '은행 바보'들의 기가 살아난 것이다.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 은행 영업점을 직접 찾아가 봤다. 모바일로 웬만한 은행 업무는 볼 수 있는 시대, 하필 장맛비에 돌풍까지 분 날이라 허탕을 짚나 싶었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10분에 한 명꼴로 들어오는 손님에게 일일이 방문 목적을 물었더니 대부분 "예적금 상품 상담"이라고 답했다.
박경미(58)씨도 그랬다. 이달 목돈이 생길 예정이라 시중은행들을 직접 돌면서 상품을 비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새마을금고, 신협뿐 아니라 지역 은행들까지 가리지 않아요.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곳에 맡기려고요."
설정은(82)씨는 지난달 초 일찌감치 다른 은행의 6개월 만기 상품으로 갈아탔다. 그는 주식 투자로 돈을 날린 이후 "묶어 두고 신경은 안 써도 되는" 단기 예적금 상품만 쫓고 있다. "큰돈을 벌 수는 없지만 요즘엔 금리가 조금이라도 오르니 은행만 고집했던 과거가 보상받는 기분이에요."
배순창 SC제일은행 수신상품부 부장은 이날 "금리 이벤트 시작 전에 비해 정기예금 신규 건수가 138% 이상 증가했다"고 귀뜸했다. 기자가 방문한 본점뿐 아니라 전국 영업점을 합친 규모다. 그는 "비대면 정기예금 신규 가입 건수도 30% 이상 증가했다"고 전했다.
2040 이용자가 많은 온라인 공간도 역머니무브가 대세다. 예적금 특별판매(특판) 시작 시간에 맞춰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을 '광클'(광속 클릭)하는 신풍속까지 생겼다. 한 지역 신협의 연이자 6% 정기적금(12개월 만기)에 가입한 누리꾼의 후기는 이렇다. "0시 넘어서 바로 가입했는데 앱이 이렇게 버벅거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티켓팅하는 느낌!"
예적금 정보 공유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 재테크 커뮤니티에서 '예적금'이나 '특판'을 검색하면 하루 10~20건의 게시물이 뜬다. 대부분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이나 핀테크 기업의 상품 소개 글이다. '미리 입출금통장을 개설해 가입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당부도 많다.
결혼 3년차 회사원 이상용(33)씨는 카카오뱅크 단기 적금, 회사 연계 은행의 고금리 예적금 상품, 보장성 보험을 통해 당분간 '시드머니(종잣돈)'를 모으는 데 주력하기로 다짐했다. 그는 "3%밖에 안 된다고 해도 적금은 이자가 복리로 붙는다"며 "모으고 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종잣돈은 경기가 좋아지면 부동산에 투자할 계획이다. 배우자 명의로 투자했다는 2,000만 원어치 주식에 관해 묻자, "당분간 없는 돈인 듯 여기기로" 했단다.
시중은행의 예적금 잔액은 역머니무브의 바람을 타고 증가세다. 지난달 말 KB국민·농협·신한·우리·하나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1월 말 대비 18조 원(2.7%)이 늘어 685조 원이 됐다. 정기적금도 3조 원 가까이(8.4%) 늘었다.
우리은행이 지난달 22일 출시한 최고 금리 3.2%의 정기예금 특판은 가입자가 몰리며 한도를 2조 원에서 3조2,000억 원으로 늘렸다. 케이뱅크의 연 5% 적금은 이틀 만에 10만 계좌가 완판돼 '앵콜 이벤트'까지 열었다. 앵콜 이벤트는 열흘 만에 완판됐다.
다른 은행들도 예적금 금리를 3~5%대로 속속 올리며 역머니무브는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현재와 같은 시장 침체가 계속되고 마땅한 대안 투자처를 찾지 못한다면 역머니무브는 일정 정도 지속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