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을 끊어버렸다. 그전에도 거의 보지 않았지만, 돌이켜봤을 때 내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인터넷도 하는데 텔레비전까지 멍하니 보았다가는 책을 보고 거기에 더해 생각을 한다거나 하는 의식적 활동에 지장을 받을 거라는 강력한 확신 때문이었다. '세상에 뒤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디어가 등장한 후 우리는 무언가를 알 자유보다 무언가를 알지 않아도 될 자유를 강력히 속박당해 왔다. '뭔가 꼭 알아야만 할 대단한 것이 방영되면 분명히 알고 싶지 않아도 그것을 알게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TV에서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을 단 한 번도 시청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내가 과연 그 프로그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들의 '짤'을 인터넷으로 하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집에 방문했을 때 얼핏 텔레비전을 켜 놓은 것을 지나치면서 계속 신기하게 여긴 건 토크 프로그램인데 계속 한글 자막이 뜨는 장면이었다. 귀를 계속해서 집중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 현대인을 위해 재미있는 부분을 자막으로 마구마구 '이 부분이 이래서 재미있다'라는 강조를 해 주는 것 같았다. 이 점은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 간혹 유튜브를 보면 이러한 친절은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이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니 이것을 재미있어 하세요!'
나는 반항심이 유별난 인간이라 이러면 오히려 재미있지가 않은데, 텔레비전은 물론 유튜브나 SNS에서 최근 화제가 된 TV클립 같은 것이 재생되는 것을 되도록 피하려 해봐도 쉽지 않다. 최근에는 연예인들이 훌륭한 무대를 펼치거나, 화려한 기량을 선보이거나 할 때 사람들이 내놓는 감탄사도 불편하다. 그들의 감탄사는 "찢었다", "미쳤다" 둘 중 하나다. 어디가 어떻게 훌륭했는지, TV에 출연할 정도의 전문성을 활용해 좀 더 이야기해 주면 좋을 텐데 그냥 '찢었다'면 끝이다. 아름다운 장면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아름답다'는 찬사로 끝나지 않는다. 꼭 '미쳤다'고 해야 한다. 얼굴도 미쳤고 몸매도 미쳤다는 것이다. 나야 어른이니 거슬리고 말면 되지만,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들이 한창 미디어에 관심이 많을 어린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스럽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뒷세대에게 빌려서 먼저 사용하는 것이니 소중히 사용하다 돌려줄 의무가 있다.
나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바르고 정확한 한국말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프로가 종종 방영되던 시절에 어린이였던지라 이런 걱정은 없이 자랐다. 그런데 요즘은 뭐든 찢었고 미쳤다는 건 약과고, 맛있으면 다 '마약'이고 좋은 것도 다 '마약'이라는데 아이들이 진짜 마약과 가짜 마약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다. '노키즈 존'으로 어린이들을 따돌리고 '민식이법'을 배격하는 어른들이 '주린이' '헬린이' 하며 어린이의 약자성은 편할 때 가져다 쓴다. 구두약과 똑같은 용기에 든 초콜릿을 보고 진짜 구두약 핥는 아이가 없는지 걱정하는 건 내가 소심하다 치더라도, 아이들이 마약이 좋은 거라 착각할 염려는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뭘 쓰다 돌려줘야 할 기한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우리가 돌려줘야 할 한국어를, 지금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