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어 죽이기 나선 푸틴... "랭귀사이드로 혼 말살"

입력
2022.06.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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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 특파원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 ④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지우기'를 몰아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어의 말살, 이른바 '랭귀사이드'가 러시아의 점령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현지 취재 결과 확인됐다. '랭귀사이드'는 '랭귀지'(Language·언어)와 '사이드'(-cide∙살해)의 합성어로 국가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우려는 시도다.

타라스 크레민 국어보호위원은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언어는 국가의 유전자(DNA)나 다름없다"며 "'우크라이나어 죽이기'는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가 달성하고자 하는 주된 목표"라고 말했다. 전사한 우크라이나군 추모패에 적힌 글귀마저 러시아어로 바꾼 것은 러시아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랭귀사이드' 사례 수집하는 우크라... "러, 체계적"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해 2월 러시아 침공 이후 발생한 랭귀사이드 사례들을 모으는 중이다. 수집 작업은 국어보호위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타라스 위원은 "지역 정부의 보고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모니터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례를 수집한다"고 소개했다.

랭귀사이드 사례가 보고된 지역은 주로 러시아가 장악한 곳이다. 우크라이나 남부 멜리토폴, 마리우폴, 헤르손 등이다. 타라스 위원은 "러시아의 랭귀사이드는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러시아가 랭귀사이드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는 것에 대항해 우크라이나도 랭귀사이드 방지를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광고·표지판 등에서 빈번... 우크라 "시민 권리 빼앗는 것"

우크라이나 정부가 파악한 자료를 확인해봤다. 랭귀사이드는 ①광고와 표지판 등(33%)에서 가장 많이 발견됐다. 타라스 위원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반드시 누려야 하는 권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가령 러시아어로 된 도로 표지판을 해독하지 못하는 우크라인은 일상 생활이 불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광고와 표지판에 쓰인 언어는 별다른 저항감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읽는 사람들에게 스며든다는 점도 러시아가 노린 것으로 보인다.

②교육 현장(22%)이 그 뒤를 이었다. △러시아는 점령 지역의 교육 과정을 러시아어로 진행하도록 했고 △이를 거부한 학교장을 해임하거나 교사를 납치하는 방식으로 강제했다. 교육 분야 랭귀사이드는 파괴력이 더 크다. 타라스 위원은 "이를 아는 교사 등이 랭귀사이드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③문화 분야(13%)도 러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책을 보유한 도서관 파괴 △학교 문헌 몰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전 관계를 묘사하는 도서 파기 △각종 콘텐츠에서 우크라이나 현대사 지우기 등을 파악했다. 타라스 위원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역사교과서를 수정한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러시아어와 문화를 홍보하는 행사도 자주 개최됐는데, 이 역시 일방적 문화 이식을 위한 랭귀사이드의 일환이다.

④미디어 분야(13%)도 안전하지 않았다. 타라스 위원은 "멜리토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 TV 채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러시아 채널로 이미 변경된 지역도 있다"고 소개했다.


"언어 위협=국가 위협... 국제사회 널리 알릴 것"

일제강점기 사례에서 보듯, 언어가 사라지면 국가, 민족, 역사도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을 침략국은 정확히 알고 있다. 타라스 위원은 "랭귀사이드는 곧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랭귀사이드 차단을 위해 국제 여론전을 펼 계획이다. 타라스 위원은 "영어 버전의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국제기구에도 전달할 것"이라며 "각국이 성명서 등을 통해 러시아 규탄에 동참하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다만 여론전만으로 러시아의 언어 말살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타라스 위원은 "우크라이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 시대를 겪어 모국어의 중요성을 잘 아는 한국도 관심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키이우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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