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를 가르는 '옹졸한' 기준

입력
2022.07.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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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김가진


김가진(1846.음1.29~1922.7.4)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농상공부·법부 대신과 규장각 대제학을 지냈고, 독립협회·대한협회 창설과 대동단 설립·운영을 주도한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도 간여한 인물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하사한 남작 작위 등이 문제가 돼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오늘은 그의 100주기다.

조선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의 서얼로 태어나 당시 서얼에게 허용된 하위직인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그는 갑신정변으로 적서차별이 없어진 뒤 과거를 치러 오늘날의 대통령 연설 비서관에 해당하는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이 됐다. 박학다식하고 강직해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는 그는 1887년 주일공사관 외교관으로 만 4년 일본에 주재하며 서양의 신문물과 개화 사상을 익혔다. 그는 반청주의자였고, 굳이 따지자면 친러파, 즉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조선-대한제국 왕실 법통에 구애받은 복벽(復辟)주의자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동단을 통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추진한 일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에 대한 그의 신념은, 관직에 있던 때부터 1908년 대제학에서 퇴임한 이후의 모든 행적을 통틀어 보더라도 한 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을사조약에 반발하다 충남관찰사로 좌천당했고, 퇴임 후 대한협회를 조직해 일진회와 맞섰고, 항일 ‘혈전(血戰)’을 목표로 국내에서 비밀조직 대동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았다.

그가 일본이 부여한 작위를 두고 가타부타 하지 않은 것은, 그 수작(授爵)의 수작(酬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가보훈처가 서훈을 주저하는 명분은 그 밖에도 몇 더 있지만 그의 행적에 비하면 사소하다. 친일파에 대한 기준만큼이나 독립운동가를 가르는 잣대도 지나치게 옹졸하고 강박적이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