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1861~1865)을 노예해방전쟁이라 말하는 건 다소 편의적이고 적절하지도 않다. 그 전쟁이 노예제 폐지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지만, 본질적으로는 상이한 조건과 이해로 대치한 남과 북 정치·경제 권력자들이 더 많은 영토와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광의의 정복 전쟁이었다. '노예 해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당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런 점에서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
6·25전쟁보다 긴 만 4년 1개월간의 그 전쟁으로 양측은 군인 37만 명(남부연합군 26만 명)을 비롯해 약 103만 명(당시 인구 3,000만 명)이 숨졌다. 인구조사에서 누락된 흑인을 빼면 만 13~43세 백인 남성 약 8%가 희생됐다.
그 전쟁 중 가장 결정적이고 격렬했던 전투가 1863년 7월 1일부터 사흘간 치러진 ‘게티즈버그 전투’다. 연방 수도 워싱턴D.C.를 향해 진군하던 남부연합군 7만5,000여 명과 북부연방군 8만3,000여 명이 필라델피아 게티즈버그 평원에서 맞붙은 그 전투에서만 양측 군인 약 6,700명이 숨지고 3만여 명이 부상했다. 북군은 방어에 성공했고, 수도를 장악해 휴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던 남군의 희망도 한 풀 꺾였다.
하지만 링컨 역시 비등하는 휴전 여론과 뉴욕 징병법 거부 폭동, 즉 300달러를 내면 징병을 면제해준 징병법에 대한 청년들의 반발로 궁지에 몰렸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해 뒤 대통령선거도 치러야 했다. 그 여론을 뒤엎은 게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링컨의 전쟁이었고, 그 전장도 게티즈버그였다.
그는 1963년 11월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헌정식에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란 구절의 짧은 연설을 했다. 그는 전몰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대의의 전쟁을 끝까지 수행해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그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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