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면서 ‘임신중지약’ 규제 여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법원 판결로 임신중지 관련 법적 권한을 갖게 된 보수 성향 주(州)의 정부들이 임신중지약 퇴출을 공공연히 벼르고 있는 탓이다. 미국에서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는 전체 사례 중 절반이 넘을 만큼 보편적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약물 접근성을 보장하겠다면서 적극 대응에 나섰다.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24일 미국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임신중지약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일례로 임신중지약 처방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저스트필에는 이날 예약 문의가 평상시보다 4배나 많은 100건 가까이 접수됐다. 대법원 판결 즉시 임신중지 금지법이 발효된 주에서 처방 요구가 많이 몰렸다. 이 단체는 여성들이 다른 주에서 원정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만간 콜로라도주 경계 인근에 이동식 진료소를 설치할 계획이다. 콜로라도주는 임신중지권을 법으로 보호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자연 유산 유도제 미페프리스톤(상품명 미프진)이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이후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합법화됐다. 2016년 복용 가능 기간을 임신 7주에서 10주로 확대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원격 진료 및 우편 배송도 허용해 접근성을 높였다. 미페프리스톤은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사용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할 정도로 안전성도 입증됐다. FDA가 원격 진료 뒤 약을 우편으로 받아 복용하는 임상 연구를 진행한 결과, 2016년 5월~2020년 9월 사이 연구에 참여한 여성 1,157명 중 95%가 후속 조치 없이 임신중지를 완료할 수 있었다.
임신중지약을 선택하는 비율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의료 기관에서 수술을 받는 것보다 비용이 크게 저렴한 데다 신체 손상이 덜하고 사생활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도 여기에 한몫했다. 임신중지권 옹호단체 구트마허연구소에 따르면, 팬데믹 첫 해인 2020년에 미국에서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는 전체 사례의 54%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들은 의약품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해 여성의 권리를 옥죄고 있다. 이미 19개 주가 임신중지와 관련한 원격 의료를 금지했고, 최근 텍사스주는 임신중지약 우편 배송을 금지하는 법도 추가로 만들었다. 대법원 판례 무효화로 앞으로 미국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임신중지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임신중지약 접근권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백악관은 대법원 판결 즉시 성명을 통해 “미페프리스톤 접근성을 최대로 허용하는 모든 방법을 확인하라고 보건복지부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비어 베세라 보건장관도 “지난 20년간 FDA가 승인한 약물 같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포함해 모든 미국인이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주정부가 임신중지약 규제에 나설 경우,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 법정 공방이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메릭 갈란드 법무장관은 “주정부는 미페프리스톤의 안전성과 효능이 입증됐다는 FDA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약을 금지할 수는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주정부가 의료 행위를 규제해 왔다는 이유를 들어 “FDA 승인이 우선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보완책으로는 우편 배송 유지ㆍ강화 방안이 거론된다. NYT는 “우편 시스템은 주정부가 아닌 연방정부가 관리 감독을 한다”며 “주정부가 임신중지약 우편 배송을 금지할 경우 법무부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