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바구니에 티셔츠?' 전국의 20대가 애타게 찾는 그 티셔츠 장수의 정체는

입력
2022.06.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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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 제작회사 '김씨네 과일가게' 이끄는 김도영
다마스 타고 전국 누비며 과일 티셔츠 팔아
'티셔츠에 재미 담겠다'는 세계관에 흥미 느낀 20대들
기존 힙합 팬 층에 SNS 입소문 타고 인기몰이


"과일 파는 곳입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한 손엔 휴대용 신용카드 포스기를 들었다. "한 바구니에 3만 원, 두 바구니는 5만 원, 구경은 공짜!" 호객행위까지 하는 영락없는 과일 장수다. 그런데 주요 고객이 20대인 데다가 인기가 엄청나다. 한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줄을 길게 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입소문을 타고 '여기도 와 달라'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출장 요청도 쏟아진다.

이 과일 장수의 정체는 '티셔츠 만드는 사람' 김도영(29)씨다. 바구니에 담긴 '과일'도 정확히 말하면 진짜 과일이 아닌 티셔츠다. 다마스를 몰고 종이상자에 '산지직송, 무농약'을 쓱쓱 적는 이 청년을 22일 서울 용산구 '김씨네 과일가게' 사무실에서 만났다.




과일 티셔츠의 첫 시작은 5월 성수동에서 진행된 플리 마켓(벼룩시장). 김씨는 "티셔츠를 만드는 사람이라 티셔츠를 팔기로 했고, 우연히 뽑은 토마토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과일을 주제로 정했다"고 말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며 판매 전략을 고민하던 김씨는 과일(티셔츠)을 담을 빨간 바구니를 마련했다. 모자에 조끼, 목토시까지 장착했다. 싹싹한 동생 조용일(24)씨까지 손을 보태 완벽한 청년 과일 장수가 탄생했다.

반응은 너무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기 뭐하는 데냐'고 물어왔고, 성수동 한복판에서 과일 바구니에 티셔츠를 넣어 파는 두 청년을 재미있어 했다. 심지어 한 어르신은 지나가면서 '과일은 없냐. 과일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티셔츠 주는 줄 알았다'고 착각할 정도. 당시 여러 인플루언서들이 준비한 '감성템(감성을 자극하는 아이템의 준말)'들 사이에서 김씨네 과일가게는 가장 빨리 매진됐다. 김씨는 "이때 생각보다 장사가 잘된 것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팔로어들에게 과일 티셔츠 팔아달라는 요청을 엄청 받았다"면서 "반응이 오니까 과일 티셔츠 한번 팔아볼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지지 기반은 '랩티'를 사랑한 20대 힙합 팬들


사실 김씨는 래퍼와 힙합 팬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 그는 "내가 만든 티셔츠 없는 사람을 (힙합 신에서)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면서 "지인을 통해 유재석까지도 내가 만든 티셔츠를 집에 가지고 있다"고 했다. 티셔츠를 안 받은 사람을 나열하는 게 빠를 것 같다며 웃어 보인 김씨. 과일을 인쇄해 팔기 전엔 티셔츠에 사람을 녹여냈다. 한국에서는 '해적판 티셔츠'로 불리는 '랩티(rap tee)'는 주로 해외에서 가수나 음반회사 허가 없이 만들어지는 팬 굿즈 형태의 티셔츠를 말한다. 김씨는 랩티의 개념을 넓혀 정체성이 뚜렷한 시대의 아이콘들을 티셔츠에 담았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이 래퍼 염따, 빈지노부터 최준, 오은영 등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그때그때 이슈를 빠르게 따라가면서 인물의 특징을 티셔츠에 기록하는 것이 핵심이다. 김씨에게 티셔츠 제작은 편하게 찍어내는 옷이 아니라 본질을 포착해 티셔츠 위의 그래픽으로 그려내는 예술 작업에 더 가까웠다. 2013년 티셔츠 제작을 시작한 김씨는 티셔츠를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재미있는 도구'라고 표현했다. 조용하지만 널리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티셔츠 그래픽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티셔츠가 아닌, 재미를 사고파는 2030


주로 힙합 팬들이 찾던 김씨의 티셔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과일 티셔츠 때문이었다. 지방에서 팔아볼까 생각을 하고 5월 말 700장의 티셔츠를 만들었다. 그런데 첫 번째 출장 장소인 부산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세 지역에서 팔려고 생각했던 물량이 하루 만에 다 나가 버린 것. 생각지도 못한 호응이었다. 결국 KTX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밤새 티셔츠를 찍은 뒤 다음 출장지인 대구로 향했다.

김도영씨와 함께 일하는 조용일씨는 티셔츠를 팔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행복해 밤을 새워 티셔츠를 인쇄하는 단순 노동도 감내했다고 말했다. 그는 "몸이 너무 고단했는데 이걸 참아내야 티셔츠를 팔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도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단순히 과일이 그려진 티셔츠가 아니라 재미를 판다. 그렇게 티셔츠로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건 앞에 써 있는 문구를 보고도 웃음이 터진다. '당일수확·무농약', 복숭아 앞에는 저스틴 비버의 노래 제목을 패러디한 '쟈스틴 비버 피치스...', 체리 앞에는 '정신 똑바로 체리'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과일 파는 티셔츠 장수를 알게 된 대중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을 기끼어 기다린다. 이들은 어렵게 구한 과일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SNS에 "신선한 과일 어렵게 구해왔다", "역시 국티원탑(국내 힙합 최고권위자를 부르는 '국힙원탑'을 패러디한 말)" 같은 재치있는 반응을 남기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티셔츠를 통해 전하려는 세계관인 재미에 빠져든다.



모든 것은 SNS로...인스타그램만 있으면 다 된다


김씨네 과일가게의 모든 소통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이뤄진다. 처음 판매를 요청한 것도 김도영씨를 팔로우하던 사람들이었고, 판매 일정 공지도 인스타그램에서 한다. 혈혈단신 다마스를 타고 장사하러 다니는데, 판매 장소는 이르면 1주일 전에 공지되지만 당일 바뀌는 경우도 많다. 게릴라 형식이라 어떻게 사람이 모일까 싶지만 오히려 판매 전략으로 먹혔다. 김씨는 "딱 정해진 곳이 없어서 모이는 사람 수나 장소 제공을 해주는 분들 상황에 따라 판매 시간과 장소가 시시각각 바뀔 때도 있다"고 했지만 인스타그램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소식에 빠르게 반응하는 20대들은 도리어 깜짝 이벤트로 받아들이고 바뀐 장소를 찾아다니는 걸 즐기는 이들도 있다.


'지독한 콘셉트충' 아니라 '아T(티)스트'


김도영씨는 "처음에 티셔츠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주면서 혹시라도 손님이 성의 없게 느끼지 않을까 걱정됐다"고 했다. 그런데 검은 봉지를 건네자마자 손님이 자지러졌다. 김씨는 이때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겠다고 직감했고 '김씨네 과일가게'라는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도 했다. 김씨네 과일가게는 인천, 제주, 울산, 부산 등으로 출장을 갈 계획이다. 또 홈쇼핑 출연, 백화점 팝업스토어 운영 등 기존 유통망을 통한 판매도 고민 중이다.

일부에서는 김씨네 과일가게를 '지독한 콘셉트충'이라고 깎아내리려 한다. 콘텐츠는 없이 콘셉트를 잘 잡아 성공했다는 것. 김씨는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다"며 "아무리 맛있는 과일도 싫어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며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과일 장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티셔츠를 받아든 손님의 반응을 꾸준히 살피는 김도영씨를 콘셉트 하나만으로 대박을 쳤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소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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