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이후 들이닥친 경제위기로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 ‘6ㆍ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1997년 외환위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번 위기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충격을 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무성하다. 여기에 ‘K-양극화’라는 말이 함축하듯 코로나 사태 이후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의 소득격차는 더욱 커졌다. 코로나 시기 유동성이 늘어나면서 부동산 폭등의 수혜자가 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간 자산 규모가 양극화되며 사회 갈등은 위험 수준이다. 요즘 서민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대로 “숨 넘어가는 상황”에 처해있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경제위기 상황은 사회복지제도의 강화를 추동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사회안전망으로서 복지제도의 기본틀이 갖춰진 전환점이 1997년 외환위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한 금융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의 반대 급부이기는 했지만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복지서비스 등 중추적 복지제도들이 이 시기 발전의 변곡점을 맞았다. 일례로 외환위기 직전에 3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돼 겨우 걸음마 단계였던 고용보험은 1998년 한 해 동안 ‘10인 이상 사업장→5인 이상 사업장→일용직을 제외한 전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관료는 지금도 “한 해에 시행령을 세 차례 개정했던 건 3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 중 유일무이했다”고 되돌아볼 정도다.
외환위기라는 외부 충격과 친복지 성향 정권(김대중 정부) 등장이 맞물려 우리나라에서도 복지국가를 향한 이륙이 이뤄졌지만 지난 20여 년간 복지제도의 성장발전은 진보 정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한국적 복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의 복지는 예산 맞춤형 복지에 불과했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초연금 2배 인상 같은 현금성 복지 확장은 선거용 상품이었다 하더라도 기초생활수급자의 선정기준을 최저생계비에서 중위소득으로 바꾼 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빈곤계층의 최소 생존권을 보장하는 시혜’였던 공공부조의 성격을 ‘빈곤계층에 대한 적정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로 재규정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는 ‘문재인 케어’로 이어졌다. 심지어 복지 축소를 ‘능동적 복지’로 포장했던 이명박 정부도 한몫했다. 보수진영의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 ‘무상보육’의 닻을 올렸기 때문이다.
지난주 참여연대 주최로 열린 복지운동 토론회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 복지제도의 퀀텀 점프(대도약)는 민주당 정권이 아닌 보수 정권 때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 게 과장만은 아닌 셈이다.
상황은 이렇지만 정권 출범기에 경제위기를 맞은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은 소극적이기만 하다. 지난주 정부가 공개한 복지정책의 청사진은 ‘사회안전망 강화’ ‘복지 시스템 고도화’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초라하다. 10여 년간 시민사회가 요구해 온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제 폐지는 (의료급여의) 단계적 완화 ‘검토’로 축소됐고, 코로나 사태로 도입 필요성이 입증된 상병급여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도입 추진’으로 정리했다. 제도화가 무산되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느껴진다. 보수 정권의 작품이자 고령화 사회의 긴요한 제도로 양적ㆍ질적 강화가 모두 필요한 간호간병통합서비스제도는 구체적 목표 제시도 없이 ‘확대하겠다'고만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임 보수정부에서 '한국형 복지'를 설계했던 인사를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대통령실 사회수석에 앉혔다. '윤석열 복지'의 유산을 하나쯤이라도 남기길 바라는 게 그렇게 엄청난 기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