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무갈보살의 성지, 금강산의 명성

입력
2022.06.22 19:00
25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나는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가 통일되지 않는 건 설악산 산신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분단되기 전 설악산은 북쪽에 위치한 금강산에 눌려 '꿩 대신 닭'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음 직한 울산바위 설화. 조물주가 금강산에 최고의 얼짱 바위들을 불러 모았는데, 울산바위는 늦어서 설악산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금강산의 2부리그가 설악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남한을 대표하는 절경 설악산을 가볍게 눌러버리는 금강산의 위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실제로 금강산 화암사는 금강산보다 설악산 쪽에 훨씬 가깝다. 그런데도 끝까지 금강산으로 남으려는 투쟁과 쟁취(?)의 모습을 보인다. 즉 사찰의 입장에서도 금강산 타이틀이 설악산보다 유리했던 것이다. 마치 변두리라도 서울의 강남 3구 안에 위치하는 게, 부동산에 긍정적인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만일 군사분계선이 조금만 더 위로 그어져 금강산이 남한에 속했다면, 설악산은 그저 그런 정도의 국립공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즉 38선 혹은 휴전선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설악산이라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강원도를 대표하는 교구본사, 즉 총괄 사찰은 오대산 월정사·금강산 유점사·금강산 건봉사 3곳이었다. 오늘날에는 월정사와 함께 설악산 신흥사가 들어가지만, 당시만 해도 신흥사는 본사에 소속된 작은 사찰이었다. 금강산에는 유점사·건봉사 외에도 이들과 필적할 만한 사찰로 장안사·신계사·표훈사 등 3곳이 더 있을 정도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정선아리랑'의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람구암자(八藍九庵子)"는 금강산이 불교와 관련된 성지임을 분명히 해준다. 금강산은 대승불교 담무갈(법기)보살의 성지인데, '화엄경' '보살주처품'에는 담무갈보살이 권속 1만2,000명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이 1만2,000봉이라는 것은 이를 상징한다. 또 팔람구암자란, 8개의 본사급 사찰과 다수의 작은 사찰이라는 의미다.

금강산의 담무갈 신앙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대단했으면, 원나라 진종 황제가 사신을 파견해 자신의 이름으로 향을 올리게 했을 정도였겠는가! 또 '동국여지승람' 권47에는 조선 초의 문신 권근이 1396년 명 태조 주원장을 알현할 때도 금강산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이때 주원장은 권근에게 20여 개의 주제를 주면서 시를 짓도록 했다. 그런데 이 중에 '금강산'이 포함된다. 황각사의 승려 출신이었던 주원장도 금강산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금강산 담무갈 신앙이 원나라와 명나라에서도 크게 떨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담무갈이 금강산에서 종종 모습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것을 그린 불화가 1307년의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이다. 또 '세조실록' 권38의 1466년 윤3월 28일의 기록에는 세조가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영험한 이적으로 인해, 숭유억불의 조선에서도 금강산 참배는 민중의 염원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금강산에 순례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림이라도 보면서 만족하는 문화가 생긴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등 다양한 작품이 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쳤을 때, 개인재산을 털어 구휼한 김만덕이 정조에게 아뢴 소원 역시 금강산 순례였다. 금강산의 불교 성지로서의 위상은 조선에서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