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미국의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이 신흥국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불러온 고물가로 가뜩이나 허덕이는 상황에서 미국이 급격히 돈줄을 죄면서 신흥국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가팔라졌다. 자본 유출을 저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긴축 행렬에 동참하고는 있지만, 경기 침체를 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이 댕긴 금리인상 불씨가 ‘도미노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를 불러올 거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나머지 국가들은 감기에 걸린다”는 월가의 속설이 현실이 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투자자들이 리스크(위험)가 높은 취약국가 자산을 버리고 안전 자산으로 갈아타고 있다”며 “신흥국 채권수익률은 치솟고 자본유출은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불쏘시개가 된 건 미국의 통화 긴축 행보다. 펄펄 끓는 물가를 잡기 위해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15일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나 올리면서 자금이 미국으로 쏠렸고, 신흥국 자산 가치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는 의미다.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은 비명을 내질렀다. 브라질 화폐 헤알화와 칠레 페소화 가치는 이달 들어 달러 대비 9%나 하락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만 3% 넘게 급락했다. 24개 신흥국의 주가 변동을 보여주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국 지수도 최근 일주일 새 4.7% 내려앉았다.
신흥국 채무 부담은 더 커졌다. 달러 가치가 치솟으면서 보유 중인 달러 표시 부채 실질 가치가 오르는 탓이다. 신흥국들은 지난 10여 년간 저금리 속에 꾸준히 부채를 늘려왔고,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악화를 막는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 대외 부채를 추가했다. 세계은행은 저·중소득 국가가 국외 기관에 지고 있는 부채가 올해 평균 9조3,000억 달러(1경2,000조 원)로, 전년보다 6.9% 증가했다고 추산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국가들은 금리인상으로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칠레(1.25%포인트)와 브라질(1%포인트) 체코·폴란드(각각 0.75%포인트) 아랍에미리트연합·홍콩(0.5%포인트) 등은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렸다. 한국 역시 한국은행이 7월 ‘빅스텝(0.5%포인트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가상승세를 꺾고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다. 다만 기준금리 인상은 경제 성장에 독인 탓에 되레 국내 경제 성장을 갉아먹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국가에선 금리인상조차 사치다. 이미 부채가 많아 경기 부양을 위해 쓸 실탄이 바닥난 경우엔 ‘국가부도 시계’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 스리랑카는 이미 지난달 디폴트를 공식화했다. 잠비아, 레바논, 파키스탄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등 국제 지원을 타진하고 있다. 전쟁 소용돌이에 놓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미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등은 국채 수익률이 급증(가격 하락)했다. 현재 23개국의 장기 국채금리는 미국 장기채 금리보다 8%포인트 이상 높다. 올해 초(16개국)보다 7개국 늘어난 것으로, 중·저소득국 금융 부실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연쇄 부도 가능성마저 커지고 있다. 미 연준이 다음 달에도 큰 폭의 금리 인상을 예고한 만큼, 경제 기초체력과 산업기반이 약한 국가를 중심으로 ‘디폴트 도미노’가 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1994년 미국이 1년 만에 기준금리를 두 배(연 3→6%)로 끌어올리자, 멕시코와 남미를 거쳐 1997년 태국과 필리핀, 한국까지 휘청댔던 이른바 ‘데킬라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레베카 그린스펀 유엔무역개발회의 사무총장은 “도미노 효과까지 낼 수 있는 부채위기 리스크는 코로나19 때보다 지금이 더 크다”고 진단했고, 세계은행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금융 부실위험이 다른 나라로 확산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