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싹

입력
2022.06.20 04:30
25면

경북 울진과 강원 강릉·동해·삼척 등 동해안지역에 산불이 발생한 지 100여 일이 지났다. 하지만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은 아직도 산 곳곳에 처참하게 남아 있다. 산불 피해가 가장 컸던 경북 울진군 북면의 산불 현장을 찾았다. 경사가 심해 가파르고 미끄러운 산길엔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탓에 내 몸을 의지할 만한 작은 나뭇가지 하나 찾기 어려웠다.

미끄러지길 여러 번. 고비 끝에 겨우 도착한 정상 부근은 놀랍게도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와 재들로 뒤덮여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혹성의 황무지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상상을 언제나 뛰어넘는 법. 찬찬히 살펴보니 곳곳에 연둣빛 새 생명들이 자라나 화마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통째로 숯이 돼버린 소나무에서는 새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가 하면, 검게 그을린 나무 사이에서도 활엽수 싹들이 건강하게 자라나 숲을 만들고 있었다.

죽음과 새 생명이 만들어내는 색다른 풍경에 잠시 취한 순간 고라니 한 마리가 어디선가 뛰어나와 나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인간의 실수가 만든 재앙이지만 자연은 드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감사한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져 단숨에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왕태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