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와 이번 회에는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문명들 간의 충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다. 지난 회에는 바다를 둘러싼 어민과 농민의 갈등을 살펴보았다. 이번 회에는 산림 녹화를 둘러싼 화전민과 농민의 갈등을 살펴보겠다.
화전민(火田民)이란 산에 불을 놓아서 나무를 태우고 남은 땅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문자 그대로 불로 밭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의 '산림녹화 - 화전정리사업' 항목에 따르면, 화전민을 산에서 끌어내리는 화전정리사업이 시작될 무렵인 1965년 말에 화전민은 4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해의 한국 인구가 2,650만 명이었으니, 화전민은 전체 인구에서 1.58%라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인구 100명당 1.5명 이상이 화전민이었던 것이다.
한때 화전민은 한국 사회에서 친숙한 존재였다. 최인호가 1984년에 출간한 베스트셀러 소설 '겨울 나그네'의 당시 광고에는 "밀림에 불을 놓고 타 버린 터밭에 곡식을 심는 화전민처럼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르는 방화범 최인호"라는 선전문구가 보인다. 화전민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중소설 광고에서도 화전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1982년에 개봉된 영화 '산딸기', 주병선의 1989년 히트송 '칠갑산' 등도 모두 화전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뿐인가, 천도교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그 자신이 화전민 출신이었다. 한국 시민들이 즐겨 먹는 냉면과 막국수, 옥수수차도 화전민들이 먹던 것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시민들 가운데에는 화전민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들어본 분들도 막연하게 화전민을 산에서 농사 짓는 농민이라는 정도로만 파악하고 계신 경우가 많을 터이다. 그러나 평야의 농민과 산속의 화전민은 살아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다.
농민이 한곳에 정착해서 농경에 종사한다면, 화전민은 기본적으로 옮겨다니는 유랑민들이었다. 숲을 불태워 만들어진 땅은 지력(地力) 즉 땅의 힘이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에, 화전민은 몇 년에 한 번씩 밭의 위치를 바꾸어야 했다. 동중국해 주변 지역의 농업이 벼를 기르는 논농사를 숭앙한 데 반해, 화전민은 당연히 밭농사를 지었다. 또한 화전민들은 나무를 태워 농사를 지을 뿐 아니라 숯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산속을 유랑하며 약초·산삼 등을 캐서 팔기도 했다. 즉 이들은 농업 이전의 채집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동시에, 채집하거나 나무를 태워 만든 숯을 판매하는 상업적 활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화전민은 농민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화전민의 삶의 방식은, 초원을 옮겨다니며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길러 판매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삶과 비교 가능하다. 이처럼 화전민의 유랑하는 삶은 농업적 세계관에 기반한 조선총독부 및 한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지 않았다. 미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국가처럼 보기 -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 (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2010)에서 주장하듯이, 인구와 산출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 국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화전민은 평야의 농민이나 도시민과는 전혀 다른 생존 방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 정변 직후인 1962년 겨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노태우 대위에게 전국을 암행할 것을 명했다. 지방에 보릿고개가 없어졌는지 직접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노태우는 이때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설악산 미시령 근처 화전민 부락에서는 인간도 동면한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부족한 식량을 아끼려고 한 사람이 하루에 삶은 감자 한두 개만 먹고는 누워서 잠만 자는 거예요. 그래서 에너지 소모를 줄였는지 의외로 건강하더군요."(1999년 5월 12일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433')
화전민이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생체 리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 후 자신의 현실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고 노태우 대통령은 훗날 회고했다. 5·18 민주화 운동 등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전향적인 태도도, 어쩌면 그가 설악산에서 화전민들을 만나면서 농업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복합적·다층적으로 바라보게 된 영향일지 모르겠다.
화전민은, 넓은 의미에서 산민(山民)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산민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가 중요시한 개념이다. 그는 전근대 시기에 피지배층을 모두 농민이었다고 간주하는 기존의 역사관에 반대했다. 모든 피지배층을 농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농업 중심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바다와 강에서 어업 및 하운(河運)·해운(海運)과 같은 상업 활동으로 삶을 꾸린 해민(海民), 그리고 산간 지역에서 농민과는 구분되는 삶을 영위한 산민의 존재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번역한 '고문서 반납여행' (글항아리, 2018)에는, 아미노 요시히코가 "피지배층이 곧 농민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본 구석구석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찾아간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아미노 요시히코가 산민과 해민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전까지 일본 시민들은 전근대 사회를 거의 전적으로 농민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상상했다. 이와 마찬가지의 선입견은 한국 사회에서도 널리 확인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착각은, 농촌과 도시가 존재하는 하류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류의 산림 자원을 보존한다는 산림녹화정책에 의해, 화전민으로 대표되는 산민들이 소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남부는 숲이 울창한 반면, 북부는 주로 민둥산이다. 이러한 민둥산은 조선시대 후기에도 전국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는 온돌을 때고 숯을 굽기 위해 숲을 파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상류 지역의 토양이 침식되어 중·하류에 퇴적되다 보니,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한강을 비롯한 주요 수로가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에서는 나무를 베고 화전을 만드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조선 정부의 다른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실효성은 없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이영훈 '한국경제사 1')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화전민정책과 산림보호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는 "일제가 나무를 베어갔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지만, 이는 문제의 단면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근대의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서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산림보호정책을 펼쳤으나,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제국 내의 거목(巨木)들을 베어 나무로 군함을 만드는 등의 무모한 정책을 전개했다. 현재 일본 곳곳에 남아있는 거목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벌목정책에 맞서서 지역 주민들이 처절하게 투쟁한 끝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일본의 산림학자 세타 가쓰야(瀬田勝哉)의 최근 저서 '전쟁이 거목을 베었다 - 태평양전쟁과 공목운동·목조선' (平凡社, 2021)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식민지 시기 한반도의 상황도 이로써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 한반도에서는 산림보호정책과 벌목정책이 아울러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이래의 황폐해진 산림이 채 되살아나지 못한 채 맞이한 광복. 한반도 북부에서는 특히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연료난이 심각해진 결과, 오늘날 보듯이 민둥산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한반도의 남부에는 울창한 산림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가지는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정책이다. 또 한 가지는,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을 집단화시키고 나아가 평야로 끌어내려 농민으로 만듦으로써 빨치산·무장공비의 활동 거점을 제거한다는 한국 정부의 안보정책이었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의 4·3사건 때 좌익 계열의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중산간 지역의 주민들을 해안 지역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화전이 사라졌다.(2017년 4월 24일 제이누리 '화전, 제주근대사 연구의 시작')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중산간의 '화전동'이라는 지명이, 이제는 사라진 제주도의 화전민들의 존재를 증언할 뿐이다.
제주도의 화전민을 소멸시킨 4·3사건만큼이나 비극적인 사건이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다. 북한 정부가 파견한 무장공비들은 한국 내의 활동 거점을 만들기 위해 산간 지역의 화전민 마을들에 주목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다"라고 말했다가 살해된 강원도 평창의 이승복 및 일가족도 화전민이었다. 이때 이승복의 집뿐 아니라 여러 화전민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 정부는 화전민들을 한데 모으고, 나아가 이들을 농업, 광업, 어업 등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산에서 화전민을 없애려는 정책인 화전정리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 화전민이 사라진 것은 농업 중심적 세계관과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한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 정부가 추진한 화전정리사업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의 산간 지역에서 화전 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한국의 산은 역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울창한 산림을 이루고 있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집·밭·숯가마터는 등산 코스의 이정표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 인근에는 '화전금지'라는 비석이 세워진 화전민의 집터가 남아있다. 화전민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당시의 화전정리사업 담당자들은 화전민들의 집집마다 이런 표지석을 박았을 것이다.
서울보다는 개성이 더 가까운 경기도 북부의 감악산에는 '숯가마터'와 '묵은밭'이라는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숯가마터는 화전민들이 주변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드는 곳이다. 묵은밭은 농사를 짓다가 버려진 밭을 가리킨다. 해발 675m의 감악산에서, 내가 답사한 숯가마터와 묵은밭은 350m 이하에 있었다. 대략 해발의 절반 정도 높이다. 그리고 근처에는 고려시대의 석탑을 보유한 절도 있었다. 전국의 모든 산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감악산에서는 화전민들이 인적 없는 산속이 아니라 어느 정도 주변 평야 지역과 교류가 가능한 지역에서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는 등의 생활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악산 정상에 서면 개성이 보인다. 이처럼 북한과의 접경 지역이다 보니, 감악산의 화전민들은 안보적인 목적에서 최우선적으로 화전정리사업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산에서 끌려내려온 화전민들은 정부가 마련한 집단 주택에 정착해서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들에게 제공된 주택 가운데 원형을 잘 남긴 건물이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한 채 남아있다. 강원도 지역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이 주택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얼마 전에 현지를 다녀왔다.(2020년 4월 13일 강원도민일보 '철원서 키와니스 구호가옥 발견')
마을회관에는 '키와니스촌(Kiwanis Village) 일동'이 미국 키와니스클럽 대표, 강원도지사, 한미재단 단장에게 바친 1967년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원형을 남기고 있는 키와니스 주택의 정문에는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 1966'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 주택의 주변에 있는 건물들도, 비록 외형은 바뀌었지만 1966년 당시의 위치 그대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키와니스 클럽은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본부를 둔 자선단체고, 한미재단은 1952년에 한국과 미국의 유지들이 공동설립한 한국 원조 기관이었다.
조선총독부와 한국 정부가 실시한 산림녹화사업과 화전민 정리정책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오늘날 한국 시민의 상당수는 화전민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로서의 화전민의 삶, 그리고 산민이 이루어낸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의 형태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도시민과 농민의 갈등이라는 지난 백 년간의 대립 구도. 그 그늘에서 농민과 해민의 갈등, 그리고 농민과 산민의 갈등은 조용히 농민의 승리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