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이란 말을 아는가? 어떤 게 엄청나게 많거나 끝이 없다는 걸 뜻하는 불교 용어지만 그 뜻 말고도 전라북도의 오지인 무주군과 진안군, 장수군을 합쳐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베네룩스 3국'이라 부르던 것처럼 말이다. 왜 이 얘길 꺼내느냐 하면 이번 달 초에 무주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올해로 10년째 계속되는 이 영화제는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진 않고 모토도 '좋은 영화 다시 보기'라는 조금은 느슨하고 편안한 영화 축제를 표방하고 있다. 같은 동네 살던 배우 김혜나가 이 영화제의 사회를 계속 맡아보고 있어서 해마다 6월 초에 초대를 받았는데 계속 바빠서 내려가지 못하다가 드디어 올해 아내와 함께 참가하게 된 것이다.
김혜나는 올해도 박철민 배우와 함께 개막식 사회를 보았다.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상태라 등나무운동장에 모인 관객들의 표정은 밝았다. 조성하, 신소율, 이원종, 황승언 같은 배우들이 레드 카펫 아닌 '그린 카펫'을 밟았고 내일이 기대되는 배우를 조명하는 '넥스트 액터' 코너엔 전여빈 배우가 선정되어 무대 인사를 했다. 김홍준 감독과 배창호 감독의 모습도 보였고 씨네21 장영엽 대표도 나와 인사를 했다. 영화제에 도움을 준 군수와 국회의원들도 와서 사회자들이 시키는 대로 '만세삼창'을 해서 큰 웃음을 주었다. 만세삼창은 이 영화제의 전통인데 축제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해 주고 은밀한 연대감까지 주는 효과가 있었다.
1934년 만들어진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에 오케스트레이션과 변사의 라이브 멘트를 더한 '신 청춘의 십자로'가 개막작이었는데 조희봉 배우의 능청맞은 변사 연기에 다들 깔깔대며 박수를 쳤다. 맥주를 마시면서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들었던 '불가사리'를 보기도 했다. 다소 과장된 연기와 어설픈 CG 때문에 10초마다 한 번씩 웃음이 터졌지만 1985년 개봉 당시 북한에서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북한 영화'라는 타이틀까지 얻은 작품이었다. 이정은 배우가 주연을 맡은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는 이 영화제의 최대 수확이었다.
등나무 그늘을 배경으로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누워 파란 하늘, 저녁노을, 밤 별빛으로 이어지는 조명의 변화를 느끼며 즐기는 영화제의 맛은 각별했다. 무엇보다 이 행사가 계속되는 바람에 이렇게 조용하고 신록이 우거진 고장에 상설극장이 생겨 주민들의 문화생활이 달라졌고 축제기간이면 마을 사람들이 부스를 배정받아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내와 나는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이사이 동네분들이 파는 김밥, 떡볶이, 어묵 같은 간식들을 마음껏 사 먹었다. 요즘 핫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출연한 한국 배우들과 백은하 평론가가 진행하는 야외 GV에도 참석했고 재즈 가수 말로와 선우정아의 콘서트도 보았다. 그들도 산골영화제가 좋아서 매년 내려와 기꺼이 무대에 선다고 한다. 잔디 운동장에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휴대용 의자에 앉아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에겐 정말 이런 시간이 필요했는데 여태 이걸 못 하고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무주군의 대표 축제인 반딧불 축제는 8월 27일에서 9월 4일까지, 산골영화제는 6월에 열린다. 내년 6월엔 휴가를 내서 무주로 한 번 내려가 보시라. 아내는 토요일 오후엔 십센치 공연이 있는데 그걸 못 보고 서울로 올라간다며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