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 자녀와 처조카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고교생들의 '스펙 공동체' 논란이 커지면서 한국인 유학생 전체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학생들은 "편법으로 스펙 만드는 게 '한국식 입시 전략(Korean tactic)'이란 말까지 듣고 있어, 땀 흘려 쌓아놓은 성과들이 부정당할까 봐 무섭다"고 토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다소 움츠러들었지만,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 비율은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매년 3만~7만 명대의 한국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중에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주경야독하며 유학생활을 이어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이런 '흙수저' 유학생들에게 미국 명문대 입학을 위해 '가짜 스펙'을 만들어내고 편법과 위법을 넘나들며 반칙을 일삼는 상류층의 모습은 허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좌절감, 아무리 노력해도 바꾸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박탈감, 부정을 눈감고 있는 한국과 미국 사회에 대한 분노까지. 미국에서 만난 유학생들은 "최선을 다하면 작은 성과라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학비에 생활비까지 악착같이 벌어야 해요. 원하는 대학에 편입하겠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으니까요."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위치한 '디 안자 칼리지' 정문 앞에서 만난 한인 유학생 박모(23)씨는 고된 유학생활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했다. 박씨가 다니는 학교는 2년제 대학인 '커뮤니티 칼리지(CC)'로, 이곳은 UCLA나 UC 버클리 같은 명문 주립대로 편입하기 용이해 아시아계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4년제 대학 학비를 통째로 감당할 수 없었던 박씨도 지난해 디 안자 칼리지 입학을 택했다.
박씨는 이틀 동안 기자와 동행하며 미국에 상륙한 압구정식 컨설팅의 실태를 목격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이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지만, 솔직히 이젠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동훈 장관 자녀와 처조카들의 '스펙 공동체' 논란과 CC 제도를 악용한 한국 상류층의 불법 컨설팅은 나 홀로 미국 땅에서 4년을 버틴 '악바리' 유학생의 마음마저 흔들고 있었다.
박씨의 미국 유학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가족들은 일반고에 적응하기 힘들어 유학을 가겠다는 박씨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씨는 장학금을 준다는 미국 공립고교를 찾아내 유학길에 올랐고, 부모에겐 미국행 비행기 티켓값만 받았다.
그는 CC에 입학한 뒤 매년 3,000만 원에 달하는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충당하고 있다. 서점 안내직원, 전시회 안내, 통역 알바 등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으며, CC에 함께 다니는 동료 유학생의 과제를 대필해주고 돈을 번 적도 있다.
일주일 내내 공부와 일을 병행하느라 늘 심신이 피곤했지만, 박씨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고교 땐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고, CC에서도 좋은 학점을 유지하고 있다. 진로 상담을 받으러 다닐 땐 "컨설턴트나 부모를 끼고 오지 않은 한국 학생은 처음"이란 말까지 들었다. 비교과활동을 중시하는 미국 대학입시 기준에 맞추려고 공부만큼 테니스도 열심히 했다. 교수들에게 연구 제안 메일도 꾸준히 보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몰랐던 불공정한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되자, 박씨는 많이 위축됐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그는 "압구정식 컨설팅이 '없는 걸 만들어내는' 수준이란 걸 알고 나니, 장점으로 생각했던 나만의 '근성'이 오히려 약점으로 느껴졌다"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이제 포기하고 부모를 원망하라고 세상이 부추기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특히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명문대에 들어가는 건 못마땅해도 받아들이겠지만, 적어도 공정하게 경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씨는 특히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된 한동훈 장관 처조카들이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에 합격한 것을 두고는 심한 허탈감을 드러냈다. 그는 "스펙 논란이 사실이라면 명문 사학으로 알려진 유펜이 기본 자질도 안 되는 학생들을 왜 합격시켰는지 의문"이라며 "미국 대학들이 아시아계 학생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준비 중인 한인 유학생들에게 논문 표절 의혹은 특히 민감하게 다가왔다. 미국에서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미국 중부지역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김모(26)씨는 최근 한국일보에 A4용지 5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엔 한동훈 장관 자녀와 처조카들에게 제기된 '스펙 공동체' 의혹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이 적혀 있었다.
그는 본보와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풀타임 연구원으로 병원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제1저자로 등록된 논문 하나 쓰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연구와 논문 경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박사과정 진학까지 미루고 있는 입장에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버리는 '한국식 사교육'이 참으로 보기 불편하다"고 밝혔다.
김씨는 학창 시절 자기소개서(에세이)에 첨삭 한번 못 받아본 자수성가 유학생이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김씨는 빚을 내서 유학 온 뒤 원하는 대학을 합격했지만, 장학금을 받아도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한 적도 있었다.
김씨는 "고교 시절 주변의 한국 유학생을 둘러보니 대부분 매달 1,000만 원 이상 들어가는 입시 컨설팅을 받고 있었다"며 "부모는 은행장, 대기업 간부, 의사, 법조인들로 8~10저자로 논문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것도 굉장한 스펙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동훈 장관 자녀와 처조카의 1저자 및 단독저자 논문은 정말 이례적"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한국 유학생들의 '스펙 공동체' 논란에 대해서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스펙 만들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불편하고 부끄럽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논문 표절과 인위적인 봉사활동 등 '가짜 스펙'은 대학 입시만을 위한 '얕은수'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김씨는 "고교 시절 A부터 Z까지 컨설팅 학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페이퍼 한 장도 자기 힘으로 작성하지 못할 정도로 적응이 힘들다"며 "그런데도 아이비리그 입학에 '올인'하는 한국 학부모와 학생들을 보면 불쌍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비뚤어진 욕망, 아이비 캐슬
<1> 미국에 상륙한 '한국식' 사교육
<2> 쿠퍼티노에서 벌어진 '입시 비리'
<3> 지금 압구정에선 무슨 일이
<4> '흙수저' 유학생들의 한탄과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