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를 만난 적이 있다. 2018년 코바나컨텐츠가 기획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회고전’ 기자간담회에서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남편입니까?” 어느 기자가 불쑥 물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잘나가는 남편의 존재를 그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연달아 세 번 부인했다. 왜 그랬을까. 요즘 행보를 보니, 제 이름이 지워진 채 ‘누구의 와이프’로 호명되는 걸 불편해하는 것이 그의 성정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의 배우자’가 된 뒤 ‘김건희’라는 이름엔 자가발전하는 힘이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의 남다른 아내 사랑, 그리고 김 여사가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호불호의 반응이 힘의 원천이다. 뒤따르는 게 환호든 욕설이든, 이름이 자주 불리면 막강한 권력이 되는 것이 현대 정치의 속성이다.
권력은 결국 영향력이다. 말 한마디로 타인의 신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힘. 그 귀한 것을 김 여사는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째가 되도록 김 여사의 일정과 동선엔 메시지가 없다. 팬클럽을 통해 직접 공개한 사진 속 그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그뿐이다. 자극을 좇은 언론의 책임도 있겠으나, ‘김건희’의 포털사이트 연관검색어가 옷, 치마, 청바지, 가방, 휴지, 슬리퍼인 것은 대통령실의 무거운 실책이다.
정치인의 여성 배우자에게 기대되고 허용되는 역할은 사회의 수준만큼이다. 지난달 미국의 질 바이든 여사는 정부를 대표해 동유럽과 중남미로 혼자 순방 외교를 다녔고, 일본의 기시다 유코 여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위해 차를 우리고 따랐다. 한국 정치인의 배우자들은 대중목욕탕에서 어르신들의 등을 밀고, 복지시설에서 밥을 푸고, 공공화장실을 청소한다. 숭고한 일이지만, 돌봄과 시중을 여성의 의무로 떠미는 차별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대통령 배우자의 버전 업을 약속한 김 여사는 달랐으면 한다. 김 여사를 둘러싼 논란에는 ‘조신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다. ‘서울의소리’ 기자와의 전화통화 녹취록을 보면, 김 여사는 그러나 혐오와 차별의 타격을 모르고 산 듯하다. “부자 엄마”와 “검사 남편”과 “남편 후배 한동훈이”가 스펙이자 안전판이었을 그의 세계에선 그랬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아는 것이다. 양성평등이라는 말이 교묘하게 배제하는 성소수자와 목숨을 던지고서야 투명인간 신세를 잠깐 겨우 벗어나는 장애인과 매일 살해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힘을 목소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들의 절규를 소음으로 듣는 것처럼 보이는 윤 대통령의 귀를 열게 하는 것이다.
김 여사는 그러나 떳떳할 수 없는 처지다. 주가 조작ㆍ경력 위조 의혹은 그의 이름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에 깊은 상처를 냈다. 그렇다고 이미 그가 꽉 틀어 쥔 힘이 선한 영향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을 싹 다 자르는 건 공공의 손실이다. 2022년의 대통령 내조는 그저 몸을 숨기고 입을 닫는 것일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실패하면 김 여사의 힘은 사라진다. 그와 가족을 겨누는 수사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증발할 수도 있다. 그런 비극이 혹시라도 닥치기 전까지는, 선과 염치를 지키며 힘을 잘 썼으면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이제는 내려놓고 ‘해야 하는 것’을 했으면 한다. 그가 젊고 당당하며 패션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넘치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