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 기름값 사상 최고 눈앞…MB의 '알뜰주유소' 같은 카드라도 있나

입력
2022.06.12 09:00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정책 효과 상쇄
기름값 역대 최대로 오른 2011년 상황과 데자뷔
MB 기름값 잡겠다며 정유업계와 '전쟁' 선포
정유사 가격 결정 구조 따져보고 알뜰주유소 도입
쏟아진 정책에도 기름값은 3년 뒤 떨어져


요즘 차에 기름 넣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부가 사상 최대로 유류세를 낮췄는데도 기름값은 연일 치솟아 사상 최고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빚어진 '에너지 대란'에 전 세계 정부가 기름값 잡기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일부 국가에서 석유회사를 상대로 초과이익을 환수하는 식의 특단의 대책까지 잇따르는 상황이다 보니, 국내에서도 '정부 역할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다만 러시아 사태처럼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시장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라 정부가 쓸 카드가 마땅찮다는 현실론도 나옵니다.



경유 이어 다음주 휘발유도 사상 최고가 찍는다


지난달 1일부터 유류세 인하 폭이 기존 20%에서 30%로 확대됐지만 정작 소비자 사이에선 정책 체감도가 제로(0)에 가깝다는 박한 평가가 쏟아집니다.

10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오전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L)당 2,053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유류세 추가 인하 조치 시행 하루 전인 4월 30일(전국 1,975원)과 비교하면 78원 급등한 겁니다. 같은 기간 경유는 L당 1,921원에서 2,050원으로 129원 올랐습니다.

경윳값은 지난달 12일 이후 연일 역대 최고가를 기록 중이고, 휘발윳값 역시 곧 2012년 4월 18일 세운 역대 최고 기록(2,062.55원)을 넘어설 게 확실시됩니다. 국내 가격의 기준이 되는 국제 휘발윳값이 역대 최고로 올랐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애초 유류세 인하 폭이 기존 20%에서 30%로 확대되면 휘발윳값은 L당 평균 83원, 경윳값은 58원 내려갈 거라고 홍보했지만, 실제 결과는 정부 예상과는 한참 어긋나는 겁니다.

코로나 엔데믹(풍토병화)에 따른 기름 수요 급증, 유럽의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등의 요인들이 맞물리면서 정책 효과를 상쇄할 만큼 기름값이 급등한 탓입니다.



11년 전 MB 때와 데자뷔?


업계에선 지금 상황이 11년 전 이명박 정부 시절의 데자뷔란 평가가 나옵니다. 당시 기름값이 사상 최고로 오르며 민생경제에 적잖은 생채기를 내자, 기름값 잡기가 지금처럼 정부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거든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40달러 수준까지 폭락했던 유가는 글로벌 경기 회복 영향으로 2010년 말부터 뛰기 시작합니다. 유가는 2011년 2월 배럴당 평균 100달러(2008년 8월 이후 처음)를 넘어섰고, 이듬해 3월 120달러로 고점을 찍을 때까지 줄곧 오름세였는데요.

유가 급등에 원달러 환율 상승(원유 수입가 증가), 미국의 이란 제재(원유 공급 불안), 기름 수요 증가 등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이 기간 국내 기름값도 고공행진을 거듭합니다. 2010년 L당 1,600원 주변을 맴돌던 휘발윳값은 그해 말 1,800원 선을 넘어섰고, 상승을 거듭해 2012년 4월 역대 최고(2,062원)를 찍었습니다.

그래서인지 2011년엔 유독 '치솟는 기름값'을 키워드로 한 기사가 심심찮게 신문 앞면을 장식했습니다. 기름값 부담에 일을 그만뒀다는 생계형 운전자의 인터뷰를 실은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기름값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이죠. 기름값을 잡기 위한 정부의 특단 대책이 잇따랐고, 언론은 정부가 '기름값 전쟁'에 나섰다고 평가했습니다.



시장경제 역행한 해법…정유사 압박해 가격 인하


기름값에 막 불이 붙기 시작한 2011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은 "기름값이 적정한지 검토가 필요하다"며 정부 부처에 첫 대책 마련을 지시합니다. 업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기름값이 묘하다"는 말도 그때 나왔습니다. 국제 유가가 오를 땐 기름값이 많이 오르는데 유가가 내릴 땐 찔끔 내려가 비대칭성이 크다는 지적이었는데요.

이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부는 일사천리로 움직였습니다. 물가 상승 주범으로 몰린 정유업계가 첫 번째 타깃이 됐습니다.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3개 부처를 동원해 정유업계를 석 달 가까이 그야말로 이 잡듯 조사했어요. 기름값 결정 구조에 문제가 없는지, 정유사와 주유소 사이에 불공정한 관행은 없는지를 샅샅이 살핀 것이죠.

하지만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결국 성의라도 표시해야 한다는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업계는 알아서 기름값을 L당 100원 내리는 조치(3개월 한시)를 단행합니다. MB정부는 이와 함께 석유 유통구조를 개선해 소비자에게 싼 값에 기름을 제공하겠다며 '알뜰주유소'도 도입했습니다. 석유공사가 공동구매 방식으로 정유사로부터 다소 할인된 가격에 기름을 사고 이를 알뜰주유소에 공급하는 방식입니다. 알뜰주유소를 통해 시장 경쟁을 촉진하면 자연히 기름값이 내려갈 걸로 본 겁니다.



2011년 쏟아진 대책…"3년 뒤 기름값 떨어졌다"


당시에도 정부 대책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놓고선 정작 시장 경제와는 반대되는 정책만 쏟아낸 데다 기름 값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류세는 아예 건들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 정책 효과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유사들이 3개월 동안 기름값을 L당 100원 내렸지만, 이후엔 유가 상승에 발맞춰 기름값이 다시 빠르게 올랐기 때문이죠.

알뜰주유소의 경우 가격 인하 폭이 애초 정부가 공언한 수준(L당 100원 인하)에 못 미치긴 했지만, 시장 경쟁을 촉진시켜 가격 인하를 유도했다는 긍정 평가와 세금으로 지방 주유소의 생태계를 망쳐놨다는 부정 평가가 공존합니다.

기름값은 2012년 4월 정점을 찍고 2013년 8월부터 내려가기 시작해 2014년 말쯤 돼서야 2010년 수준인 L당 1,700원 선에 도달합니다. 2014년 하반기부터 유가가 배럴당 평균 100달러 아래로 떨어진 영향입니다.



"현 정부는 기름값 손 놓았나" 비판


윤석열 정부도 뛰는 기름값에 비상이 걸리긴 하지만, 유류세 추가 인하 등 세금 지원책 외 그동안 별다른 대책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업계와 만난 자리에서 그저 "기름값 상승은 국민부담으로 직결되는 만큼 가격 안정화에 최대한 협조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이렇다 보니 정부가 기름값 급등에 따른 서민 고충을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옵니다.

업계에선 정부가 조만간 기름값 안정 대책을 추가로 내놓을 걸로 예상합니다. 다만 해외에선 석유사를 직접 압박해 기름값을 낮추는 거친 방식도 등장하고 있지만, 국내선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현 정부가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한 터라 MB 때처럼 업계를 압박해 인위적으로 기름값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대신 7월 말 끝날 예정인 유류세 추가 인하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이 우선 거론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한 업계 고위 관계자는 "최근 해외에서도 주로 유류세를 내려주고 있는데 세금으로 부자까지 기름값을 지원해준다거나 불필요한 기름 수요를 자극한다는 반론도 많다"며 "현재로선 유가 안정 말고는 어떤 정부 대책도 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고 말했습니다.

김동욱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