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거장이 “연기에 신이 내렸다” 한 배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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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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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지난 달 열린 제75회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 잔치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가 영화제 초반을 장식했다. 폐막일 시상식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송강호가 ‘브로커’로 남자배우상을 각각 받았다. 한국 영화가 없었으면 올해 칸은 초라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띄지 않게 한국 영화의 강세를 대변한 배우가 있기도 했다. 배두나였다. 그는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브로커’에서 불법 입양 중개인을 추적하는 형사 수진을 연기했고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다음 소희’에서는 현장실습에 나섰다 죽음을 맞이한 여고생의 사연을 캐는 형사 유진으로 출연했다. 드물게 두 작품이 초대됐으나 배두나는 칸에 오지는 못 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레벨 문’ 촬영을 해야해서였다. 배두나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그의 위상을 반증했다.

한국 여자 배우 중 배두나처럼 세계를 활동무대로 삼는 이는 딱히 없다. 정호연이 ‘오징어 게임’을 바탕으로 세계로 진출하고 있으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배두나는 2005년 일본 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 출연하며 한국 밖에서 활동을 시작하더니 곧 할리우드로 옮겨갔다.

배두나가 해외로 나아갈 수 있었던 발판은 ‘공기인형’(2009)이었다. 사람으로 조금씩 변하는 인형 노조미를 연기했다. ‘공기인형’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 지인들의 강력 추천으로 배두나에게 역할을 맡겼다. 고레에다 감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보고는 한다. '공기인형'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다. ‘매트릭스’ 시리즈로 유명한 라나ㆍ릴리 워쇼스키 자매가 ‘공기인형’ 속 배두나를 주목했고 SF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와 ‘쥬피터 어센딩’(2015), 드라마 ‘센스8’(2015~2018) 시리즈에 잇달아 기용했다.

'브로커'는 고레에다 감독이 '공기인형' 이후 배두나와 함께 10여년 만에 협업한 작품이다. 칸에서 만난 고레에다 감독은 송강호 강동원 이지은(가수 아이유) 이주영 등 ‘브로커’ 출연 배우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배두나 연기에 대해선 여러 수식으로 높은 평가를 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배두나에 대해선 진심이 느껴졌다. 고레에다 감독은 “배두나와 ‘공기인형’으로 처음 함께 일했을 때 내가 한참 못 미친다는 생각을 했고 감독으로 성장한 모습을 이번에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연출에 임했다”고 했다. 그는 배두나가 연기할 때 “이 장면은 신이 내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정말 많았다”고까지 말했다.

얼마 전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을 다시 보게 됐다. 20대 초반 배두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새삼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청각장애인 연인 류(신하균)의 유괴를 돕는 무정부주의자 영미를 연기했다. 피해자 아이가 다치지 않고 범인이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좋은 유괴’라는 궤변으로 류를 설복하는 장면, 고문을 당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경고하는 모습 등이 인상적이었다. 배두나의 연기는 20년 전 이미 완성형이었다.

배두나의 매력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얼굴이다. 고집이 살짝 깃들어 있는 그의 얼굴에는 색감이나 채도가 없다. 그 얼굴에 살짝 미소가 곁들여지면 장난기가 엿보이고, 울음이 섞이면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무채색 얼굴 덕분에 여러 역할을 소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직폭력배에게 스파이크를 날리는 배구선수 출신 전업주부 연기(영화 ‘굳세어라 금순아’)를 해도, 말 없이 눈으로만 의사전달을 하는 인형으로 변신(‘공기인형’)을 해도, 담배를 물고 냉소적으로 ‘미군축출, 재벌 해체’를 읊조리듯 말해도(‘복수는 나의 것’) 어색하지가 않다. 해외 감독들이 SF물에 배두나를 캐스팅하는 것도 외모가 적지 않게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