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할 만큼 짙은 풀 냄새가 여름이 다가왔다고 알려주는 요즘, 뜨끈해진 공기처럼 일상도 나른해지다가 갑작스러운 부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쇠한 부모님이 돌아가셨나 했는데 읽다 보니 또래 지인의 본인상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이 웃고 지냈던 기억에 울컥 목이 메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떠나 보낸 날로 기억하는 계절이 또 하나 늘어났다.
먼 역사의 인물들도 떠난 날의 회한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96년 전 오늘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를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 지도에 깊이 새긴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죽은 날이다. 한창 첨탑이 올라가던 성가족 성당에서부터 전차가 다니는 큰 길을 건너 40분 정도 거리. 성당을 짓는 동안 가우디는 매일 새벽마다 산 펠립 네리 교회를 찾아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전차 사고를 당한 날 역시 이곳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20세기 신기술을 뽐내며 쌩쌩 달리는 전차를 가우디는 "사람이 전차를 피하나, 전차가 사람을 피해야지"하며 못마땅했다는데,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가우디를 치고는 달아나버린 전차 운전수도 참 무정했다. 노숙자로 오인할 만큼 허름한 옷차림이던 피투성이 노인은 거리에서도, 병원에서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
"우와…" 가우디의 대표작인 성가족 성당 앞에 선 사람들 무리에서는 늘 같은 탄성이 흘러 나온다. 이미 사진과 영상으로 익숙한 모습일 텐데, 막상 그 앞에 서면 뭔가가 사람들의 심장을 쿵 하고 건드린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걸작을 만나는 건 그의 일생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지하 납골당의 기둥 정도만 지어진 성당 공사를 떠맡은 건 30대 초반의 가우디였다. 1884년 처음 공사를 맡을 때만 해도 흔해빠진 신고딕 양식이었던 설계도를 뒤엎고,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성당을 짓고자 그가 갈고 닦은 모든 기량을 발휘했다. 마지막 10년은 인부들과 먹고 자며 오로지 성가족 성당에만 집중했지만 74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도 그 끝은 보지 못했다.
이렇게 성가족 성당과 한 몸이 되어 버린 가우디지만, 가우디의 이름을 부를 때면 자꾸 어스름한 새벽 홀로 걸었을 골목이 떠올랐다. 어느 날 그 길을 따라 찾아간 교회에는 폭탄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움푹 파인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의 마지막 날 결국 가지 못했던 교회는 1938년 스페인 내전 때 공중 폭격을 당하는데, 그 날의 희생자는 교회 아래 방공호에 숨어 있던 42명의 아이들이었다. 근처 학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대낮이면 꿈을 품어보기도 전에 죽은 아이들이 떠오르고,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분수 소리만이 광장을 채울 때면 조용히 기도하며 꿈을 키웠을 가우디가 또다시 떠오르는 기묘하고도 슬픈 추모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며 우리는 삶을 돌아본다. 자신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완성될 건축물에 생을 모조리 바친 가우디는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저 하루하루 벽돌을 쌓았다고 한다. 그 하루가 끝을 고한 전차 사고 날, 가우디는 '이만하면 됐다' 했을까, 아니면 '하루만 더 달라' 간청했을까?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할 마지막 순간의 생각을 상상하며 우리는 저마다의 살아갈 답을 얻는다. 그가 쌓은 벽돌 위에서 그의 꿈을 먹으며 그가 품었던 희망을 키우며, 140년 동안 매일매일 자라고 있는 성가족 성당을 바라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