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촌놈이다!"
김영정(55) 평화산업(주) 노조위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봄에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고향인 경북 안동을 떠나 군위로 전학을 온 날이었다. 안동에서 학교를 다닐 때처럼 책을 보자기에 싸서 둘러메고 등교를 했다. 며칠이나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나서야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갈아신고 책가방을 둘러멜 수 있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안동에서도 시내와는 거리가 먼 시골이기는 했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동네에서 어른 대접을 받았고, 군위로 나올 때도 우시장 근처에 있던 방앗간을 사서 이사를 했다.
타향에 적응하느라 다소 움츠러들었던 기세가 온전히 회복된 것은 군복무 시절이었다. 이를테면, 마을의 문풍을 이끌었던 집안의 내력이 활활하게 살아났다.
"청송에 있는 관리대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단기사병이 너무 많아서 이를 관리할 소대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사병이 소대장 교육을 받게 했는데, 제가 1기 교육에서 당당하게 1등을 해서 사단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하사관들을 다 제치고 성취한 것이라 더 의미가 있었죠."
군복무 후에 컴퓨터를 배우러 서울 학원에 갔다가 자형의 권유로 인테리어 일을 잠깐 했다. 1993년에 대구로 내려와서 평화산업에 입사했다.
1950년 고무제품 제조회사로 출발한 평화산업은 1986년 달성공단으로 옮기면서 자동차 부품 산업에 뛰어들어 본격적인 성장기로 들어선 즈음이었다. 직원을 봐도 1980년 500명을 넘어 1989년에 700명을 돌파했다. 인력과 기술 모두 선진화되던 시기였다.
"왜 욕을 하십니까!"
1995년에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조합원들의 권유가 가장 큰 동력이었다. 일방적인 지시, 비효율적인 업무 진행, 간혹 육두문자도 튀어나왔지만 대부분 침묵하고 있을 때 혼자 목소리를 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의원에 출마하면서 근로기준법을 3번 정도 숙독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안동에서 살던 시절 할아버지는 인근 동리에서 인정받는 어른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늘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대개 당신이 결정하시는 대로 따랐다. 아버지 역시 나름의 리더십을 가지고 청년들을 이끌었다.
"아버지가 국가 유공자셨습니다. 총상을 입고 제대를 하셨어요. 집에 칼빈 총이 있었습니다. 예비군 중대장을 맡고 계셨거든요. 아버지의 삶을 통해 내 일이 아닌 공동체의 일에 헌신하는 자세를 은연중에 배웠던 것 같습니다."
평사원일 때는 본연의 업무만 파고들면 됐지만, 대의원은 조합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많았다. 작업 반장들과 맞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의원이 되고 난 후 회사에서 '관리 대상'이 되었다.
2002년 8월부터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업무를 봤다.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더 많은 공부를 했다. 교섭위원으로 들어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회계 감사에도 참여했다.
전임 노조위원장에게 받은 '수업'이 있다. 화합의 정신이다. 김 위원장은 "내가 본인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무국장으로 발탁한 것도 화합의 정신이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노노갈등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었고, 저 역시 그 생각에 십분 공감하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밝혔다.
2020년 단독으로 출마해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노조원들에게 세 가지에 힘쓸 것을 약속했다. 첫째가 고용 안정, 두 번째가 산업재해 줄이기, 세 번째가 복지와 임금 향상이다.
"고용안정은 노사가 함께 힘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생산성을 높이고, 미래를 위한 먹거리를 찾는 작업은 노 혼자서, 혹은 사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는 노사가 똘똘 뭉쳐서 미래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평화산업에서는 최근 에어서스펜스를 독자 개발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로 흔히 '쇼바'라고 부르는 댐퍼의 일종이다. 금속 스프링이 하는 역할을 공기가 대신하도록 했다. 전기차에도 적용되는 부속인 만큼 확실한 미래먹거리다.
김 위원장은 산업재해에 관해선 가장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김 노조위원장은 작업장에 안전에 위협을 주는 요소가 있으면 즉시 작업을 중단시킨다. 안정이 보장된 뒤에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해마다 산업재해가 있었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제로(0)를 기록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안전상의 문제가 있어서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일주일만에 해결되었습니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위험한 채로 계속 작업을 지속했을 것입니다. 확고한 의지를 보이면 반드시 해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장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장과 가까워져야 한다. 현장의 이야기를 두루 경청하는 것은 물론, 조합원들이 스스럼없이 조합을 찾아올 수 있도록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문턱을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회의를 진행할 때도 발언의 양이 피라미드 모양이 되도록 조정한다. 대의원을 비롯해 젊고 직급이 낮은 조합원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노력이다.
"할아버지가 조금 권위적이셨습니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게 너무 싫었거든요. 항상 조합원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합니다."
경영진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김종석 회장과 황순용 총괄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의 노력에도 감사하는 마음"이라면서 "노조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늘 진정성을 느낀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노조위원장 임기를 시작한 뒤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낚시다. 사무국장 시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업무량과 다양한 사안을 처리하느라 시쳇말로 영혼이 털리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임기를 막 시작한 즈음엔 사람들을 만나느라 일주일에 닷새 동안 술을 마셔야 했던 적도 있고, 3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이러다 몸이 마음이 망가지겠다 싶어 찾아낸 탈출구가 낚시였다.
"그냥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거죠. 어느 시구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도취되어서 입질을 해도 낚아챌 생각을 못합니다. 자연의 품에 안겨서 마음을 쉬는 거죠."
영혼을 위로하는 낚시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초임 노조위원장으로서 감내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까닭이다.
"올해로 3년차인데, 풀어야 할 과제를 놓고 보면 아직 3일째 같은 느낌입니다. 조합원들의 권익을 대변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활동해야겠죠. 특히 올해는 장기근속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세히 말하면 임금피크제 철폐를 화두로 던져놓은 상태입니다. 우리 회사 슬로건이 '좋은 환경에서 우수제품 만들어 함께 잘살아 보자'는 것인데, 최종 목표를 향해서 더 열심히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