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와 진영 논리

입력
2022.06.08 00:00
26면
반지성주의 비판마저 진영논리에 휘둘려
진영논리라는 이념의 '동굴'에서 벗어나
그림자 대신 '햇빛' 속의 진실 마주해야

최근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염려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지난 5월 10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문재인 전 대통령은 경남 양산 사저 주변에서 확성기를 틀고 밤낮으로 욕설을 내뱉는 일부 보수단체의 집회를 가리켜 "반지성이 작은 시골마을 일요일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후 SNS나 소셜미디어 등을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서로를 반지성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정치학자로서 한편으로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반갑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마저 진영 논리에 따라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아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혐오, 지성에 대한 적대적 태도 등을 의미하는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3년 출간한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에서 매카시즘과 기독교 복음주의로 대변되는 미국의 반지성적 풍조를 비판하며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서양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플라톤은 '국가' 제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비판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두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눈에는 불분명하고 보이지 않으나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 가운데 진정한 세계, 즉 사물의 본질과 진실을 드러내주는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현상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 즉 일부 진실을 드러내긴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그림자의 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평생 동굴 속에서 그림자만 보며 살아온 '대중(hoi polloi)'들은 사물의 본질과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그림자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플라톤은 이러한 대중들이 자신들을 동굴 밖으로 인도해 나가려는 '철학자'들을 비웃고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죽이려 한다고 지적하며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몬 당시 그리스 시민들의 반지성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와 마찬가지로 최근 우리 사회에도 '철학자'들을 비웃고 적대시하는 반지성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다. 사물의 본질과 진실에 대해 알지 못한 채, 또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진영 논리에 갇혀 SNS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그림자'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조롱하는 반지성주의가 넘쳐난다. 여기에 더해 우리 사회에서 응당 '철학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정치권과 언론, 학계 또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각 진영의 동굴 안에서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나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동시에 SNS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진영 논리에 갇혀 이념의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죄수'들이 동굴 밖으로 걸어나와 '햇빛' 속에서 진실을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처음에는 너무 환한 '햇빛'에 눈부시겠지만 익숙해지면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관찰할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한다.


김범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