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보현(1917~2014). 한국 화단에서 사라진 이름 석 자였다. 해방과 6· 25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쫓겨나듯 도망치듯 도미하면서다. 좌우 양 극단으로부터 각각 '빨갱이'와 '친미 반동'으로 몰려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했던 그가 유일하게 머문 곳은 그림뿐이었다. 60년 가까이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한인화가 포 킴(Po Kim)이다.
그의 후기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뉴욕의 한인화가 포 킴'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1998년 완성한 '파랑새'를 시작으로 그가 말년에 그린 작품 중 엄선한 23점을 내걸었다.
화려하게 생동하는 따스한 색채, 자유롭게 유영하는 새와 물고기, 성별·나이·신분 등 모든 사회적 코드로부터 해방돼 평화로운 모습의 인물들… 대형 화폭에 주로 그린 이 시기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정치든 뭐든 잊어버리고 오히려 환상적이고 꿈나라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다는 포 킴. 야만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한 그가 꿈꿨던 지상낙원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특히 새의 모티프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동시에 작가 자신을 투영한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도쿄 메이지 법대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치과의사였던 광주 출신 부인을 따라 해방 이후 광주에 정착했다. 1946년 조선대 미술학과 창설을 주도하며 초대 학과장을 지내며 순탄한 삶을 사는가 싶었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 전기 고문을 당했다. 학생들과 홍도로 스케치 여행을 갔다가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죽을 고비도 넘겼다. 좌익으로부터 친미 반동으로 지목돼 붙잡혀가기도 했다. 전쟁 중 광주에 주둔한 미군 대령의 딸을 가르쳤다는 이유였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질 않았다. 공포는 아주 오래 지속됐다. 경찰에 쫓기는 끔찍한 꿈을 자주 꿨다." 훗날 그의 소회다.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초청받았을 때 그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떴다. 2년 후 뉴욕에 눌러 앉았다. 수중엔 300달러뿐이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넥타이공장에서 시급 1달러를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김보현이란 이름을 지우고 두 번째 부인이자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실비아 올드의 제안으로 현지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포 킴이란 작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야요이 쿠사마, 아그네스 마틴, 로버트 인디애나 등 미국 주류 미술계와 소통했고 유학 온 김환기, 김창열, 남관과도 교유했다. 조영 포킴&실비아올드 재단 이사장은 "김환기, 백남준보다 먼저 미국으로 와서 미국 주류 화가들과 교류하며 60년 작업한 화가"라며 "포 킴을 제대로 알리는 일은 세계미술사 속에 한국미술사를 자리매김하는 데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2014년 세상을 뜨기 전날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그는 그림 안에서 숨구멍을 찾았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전시 서문에서 "포 킴의 작품에는 한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삶, 그 희망과 향수의 수레바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때로는 죽음처럼 어두운 과거가, 때로는 유토피아 같은 밝은 미래가 교차한다. 포 킴은 '지상의 낙원'을 그렸다"고 썼다. 전시는 오는 12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