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488일, 577일의 전쟁

입력
2022.06.03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모든 동물(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이 문장은 유럽연합(EU) 문 앞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현실이 됐다.” 영국 BBC방송은 우크라이나 전쟁 열흘 뒤인 3월 6일, 유럽 대륙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는 무관심한 사회상을 꼬집으며 이같이 전했다.

지난 2월 24일 새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꼭 100일이 됐다. 그간 세계는 러시아군의 반인륜적 범죄를 수없이 목도했고, 함께 분노했다. 많은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선언했다. 각국 시민들도 평화와 반전(反戰)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서거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던 우크라이나인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다. 낯선 나라의 전장에 직접 뛰어든 사람도 더러 있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인류애는 싹튼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에 가려진 또 다른 전쟁을 생각해본다. 국가 간 때로는 국가와 무장단체 간 벌어진 유혈 사태,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이상’을 위해 희생되는지 알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스러져간, 더 오래됐지만 덜 주목받는 잔혹사에 대해 말이다.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순간에도 세계 약 40개국에서 포화와 총성이 이어지고 있다.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는 2020년 11월부터 정부군과 반군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이고 있다. 오늘로 꼭 577일째다. 그간 최소 1만 명,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무고한 목숨이 사라졌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집단학살도 최소 230건 발생했다. 여성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약탈, 처형 등 각종 만행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작년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촉발된 내전은 488일째를 맞았다. 최소 1,700명 시민이 군부에 의해 살해됐고, 일부는 전기고문을 당하거나 인간 방패로 이용됐다.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국민 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시리아, 반군과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연합군 간 전쟁이 7년째 이어지면서 15만 명 넘게 숨진 예멘 사정도 우크라이나보다 덜하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국제사회 관심이 닿기에 이들 국가는 너무 멀리 있었다. 물리적, 심리적, 특히 정치적으로. 각국은 서방과 러시아의 패권 전쟁 양상을 보이고 오랜 국제질서마저 바뀌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달리 ‘얻을 것 없는 싸움’에서는 일찌감치 시선을 거뒀다. 전쟁 결과가 불러올 글로벌 파장이 서로 다른 만큼 자연스러운 대응이라는 ‘그럴듯한’ 분석도 나왔다. “세계가 인류를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 관심이 필요한 다른 지역을 잊어선 안 된다”는 국제기구 수장들의 호소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떠돌고 있다. 그렇게 티그라이와 미얀마, 시리아의 고통은 뒷전으로 밀렸다. 기억 속에서 잊힌 이들의 죽음은 개별적 비극이 아닌, ‘10만 명 사망’ 같은 숫자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영향력이 다르다고 목숨의 무게까지 다를 리 없다. 100일, 488일, 577일의 전쟁을 맞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는,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말이다. 그래야만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소설 속 결말보다는 더 나은 현실을 마주하지 않을까.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