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첩보전서 사지 내몰린 英 정보국 루저들의 따뜻한 연대

입력
2022.06.04 10:00
19면
<89> 애플TV플러스 '슬로 호시스'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스파이라고 하면 007, 제임스 본드를 먼저 떠올린다. 세계를 여행하며 멋진 여인을 만나고, 악당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초월적인 영웅. 하지만 007의 출발점은 판타지가 아니었다.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한 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나온 '카지노 로얄'부터 007시리즈는 조금 더 무거워지고 어두워졌다.

스파이의 세계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국가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첩보전의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의미가 없다. 집단의 싸움에서 개인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5)', '콘스탄트 가드너(2005)',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2011)'와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1973)', '오데사 파일(1974)' 등 걸작 첩보영화에서 그려지는 첩보전의 세계는 낭만은커녕 비정하고 야만적이며 암울하다.


존 르 카레와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영국 출신이고,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영화를 비롯한 영국이 만든 첩보물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이 스파이의 종주국이기 때문일까. 드라마에서도 톰 히들스턴과 휴 로리,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나온, 존 르 카레 원작의 '더 나이트 매니저(2016)'는 깔끔하고 서늘했다. 박찬욱의 '리틀 드러머 걸(2018)'도 존 르 카레 원작이다. 애플TV플러스의 첩보물 '슬로우 호시스'의 원작을 쓴 믹 헤론도 영국 출신이다. 믹 헤론의 소설 '슬로 호시스'는 2010년 발표됐고, 이후 11권을 발표한 '슬라우 하우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슬로 호스(Slow Horse)'는 낙오자라는 의미다. 영국의 보안정보국 MI5에서 사고를 치거나 실수로 작전을 망치거나 하면 '슬라우 하우스'로 좌천된다. 슬라우 하우스에서 다시 본부로 돌아간 요원은 없다고 한다. 알아서 그만두거나 은밀한 임무에 투신하며 사라진다. 슬라우 하우스의 책임자인 잭슨 램은 한때 전설적인 스파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만 보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술을 마시고, 양말에는 구멍이 나 있고, 누구에게나 독설을 퍼붓는다. 자신에게도, 조직에도 전혀 성실해 보이지 않는다.


첫 작전을 망치고 슬라우 하우스로 온 리버 카트라이트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때 좌파였다가 극우로 전락하며 한물간 기자 로버트 홉든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 정도다. 다른 요원들도 과거의 자료를 분석하는 일 정도만 주어진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일을 소일거리로 던져주는 정도. 슬라우 하우스에서 유일하게 램의 인정을 받는 시드는 홉든의 USB를 복사하는 임무에 성공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흘러가던 중, 큰 사건이 벌어진다. 극우 단체 '앨비언의 아들들'이 무슬림 청년 하산을 납치하고 유튜브로 생중계를 하며 다음 날 아침 참수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낙오자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였지만 램은 뒤에 놓인 검은 손을 눈치챈다. 왜 본부에서는 홉든의 정보를 원했을까, 왜 카트라이트를 슬라우 하우스로 보내야만 했을까, 왜 램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부인에게 감시하게 한 것일까. MI5 내에서 비밀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슬라우 하우스 전체를 희생양으로 쓸 계획이었음을 램은 꿰뚫어본다.


램을 연기한 배우는 게리 올드먼이다. '레옹'의 섬뜩한 연기로 유명해진 게리 올드만은 개성적인 악역을 넘어 우리 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배우의 하나로 우뚝 서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의 조지 스마일리,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는 배트맨의 파트너라 할 짐 고든,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는 시리우스 블랙이었다. 어떤 캐릭터를 맡더라도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늘 불꽃이 튀었다. 램의 게리 올드만도 보고 있으면 순간 전율이 일고, 때로 폭소가 터져 나온다. 게리 올드만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슬로 호시스'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잭 로던, 올리비아 쿡,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등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슬로 호시스'가 그리는 영국의 MI5는 결코 선한 조직이 아니다. 세상에 선한 조직이라는 것은 없다.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경단이 모두를 착취하는 폭력조직으로 성장한 것처럼, 다른 나라와 경쟁하고 생존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고 비밀임무를 수행했던 정보조직은 오로지 지배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위법, 탈법을 자행하게 된다. MI5의 부국장은 극우 단체에 의한 민간인 납치를 은밀하게 공작한다. 극우 테러 집단의 폭력에 대중이 공포를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여세를 몰아 법을 만들고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램은 첩보전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스파이다. 앞에서 활짝 웃으며 내보이는 좋은 패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적들만이 아니라 같은 나라 같은 팀이라도 필요하면 동료를 사지에 내모는 것이 첩보전이다. 국가의 이익,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모든 요원은 장기판 위의 말이 되고 희생양이 된다. 중상을 입은 시드 때문에 괴로워하는 카트라이트에게 말한다. "나는 네 나이 때, 친구 13명을 잃었어. 베를린 장벽이 있을 때도 좋지 않았는데, 무너지고 나서는 더 엉망이 되었어. 요원 네트워크가 드러나고 친구들이 죽었지."

MI5 요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탁월한 스파이 램은, 왜 슬라우 하우스에 폐인처럼 틀어박힌 것일까. 화가 거듭될수록 램의 능력, 과거가 드러난다. 가리워진 인간성 역시. 초반의 램은 너무나 비호감이다. 외모와 하는 짓이 지저분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던지는 모든 말은 조롱이고 독설이다. "너희들은 최악의 요원이고 너희들하고 함께 한 시간은 내 최악의 경험이었어."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중반쯤 가면 램의 독설이 오히려 다정하게 들린다. 절대로 후배들을 칭찬하지 않지만, 대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준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래야 그들을 살릴 수 있으니까. 램은 부국장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루저라고 생각해. 그래도 내 루저들이지."


'슬로 호시스'는 램과 루저들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돌파하는 이야기다. 큰 액션은 없지만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차 있다. 절박한 위기 상황은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차갑고, 통렬하고, 잔인한 영국식 유머가 넘쳐난다.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말은 거짓일까? 명백한 절벽에서 그는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여기서 '그'는 '슬로 호시스'의 모든 이에 해당한다. 진실을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첩보전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를 찾아야 한다.

'슬로 호시스'는 정보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대중과 사회를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맹신을 조롱한다. 시스템을 완전히 부수지는 못해도 램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를 통해 한껏 비웃는 첩보물의 걸작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