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 모시듯' 전 세계가 대만 반도체 회사 유치에 사활 건 까닭은

입력
2022.06.0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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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가 기침하면 전 산업이 감기에 걸린다"
이익률 45%에도 TSMC에 줄 선 각국 정부·기업
"맡으면 손해봐도 감수"...파운드리만 40년 고집


"'자스므(JASM)' 말이죠? 아유 여긴 난리예요, 난리. 담당자도 아닌데 현청 직원 모두 반도체 연수를 두 번이나 받았어요. 대만에서 오는 기술자랑 가족들 지원해야 한다고 벌써부터 준비하느라 엄청 바빠요." 구마모토현청 직원의 말이다.

'자스므'란 대만의 반도체 기업 TSMC가 일본에 설립한 합작회사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을 구마모토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구마모토공항에서 약 15분쯤 북쪽으로 운전하다 좌회전, 30번 도로로 빠지면 멀리서 하늘 높이 솟은 타워크레인이 눈에 들어온다. JASM 공장 건설 현장이다.

지난해 12월 방문했을 때만 해도 포클레인과 덤프트럭밖에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수십 개의 타워크레인이 21.3헥타르의 넓은 부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경계가 다소 느슨했던 터파기 작업 때와는 달리 4월 21일 착공이 시작된 후론 공사 차량 출입구마다 경비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완공 목표는 내년 12월. 이후 1년 동안 장비 도입과 테스트 등을 거쳐 2024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제품을 출하한다는 계획이다.

JASM은 TSMC의 해외 진출 사례 중 드문 합작회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약 20% 지분을 갖고 있는 소니세미컨덕터솔루션과 10% 지분을 취득한 덴소 등 일본 기업은 모두 JASM의 반도체를 납품받을 기업들이다. 소니는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이미지센서의 세계 1위 제조사이고, 덴소는 도요타 등 자동차 메이커에 부품을 납품한다. 일본 기업 납품 목적이다 보니 생산 공정은 22~28나노미터(㎚ㆍ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및 12~16nm로, 5nm 이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최첨단 공정은 아니다.


파격적 자금 지원부터 파견 직원 생활 지원까지...'상전 아니냐' 소리도


일본 정부는 경제안보 측면에서 반도체라는 전략 물자를 자국 내에서 확보하기 위해 JASM 공장 건설 비용 약 86억 달러(약 10조7,000억 원)의 절반을 대는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정부 지원은 자금에 그치지 않는다. JASM을 비롯한 반도체 기업에서 일할 인재 확보를 위해서 문부과학성도 나서 주요 대학에 반도체 연구개발 거점을 구축하기로 했다.

구마모토 현지 지방자치단체도 발 벗고 뛰고 있다. 대만에서 올 320명의 기술자 및 그 가족의 생활 지원 준비에 특히 신경 쓴다. JASM은 앞서 2월 말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대만에서 올 직원들을 위한 주택 확보와 국제학교 등 교육 지원, 공장지대 인근 교통 정체 대책, 인재 확보 지원 등을 위한 적극적 협조를 지자체와 관계자에게 요청했다.

현청은 심지어 JASM에 대한 뜬소문이 퍼지는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JASM이 언론 접촉을 일절 하지 않고, 지자체에 요청 사항을 전달한 온라인 세미나에서조차 녹음·녹화를 금지했을 정도로 정보 보안에 철저하다 보니 엉뚱한 말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상전 모시듯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없지 않지만 TSMC 공장 유치는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일이므로 최대한 돕겠다는 자세다.

JASM과 공장 입지협정을 체결한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의 담당 직원은 "조인식 당시 모리타 유이치 JASM 사장이 일본에 공장을 짓게 된 것은 인재가 풍부하고 거래처인 소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면서 "JASM이 언론 접촉을 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정보는 밝히고 있어 지원에 별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TSMC 기침하면 산업계 감기 걸린다'...TSMC에 줄 서는 이유


TSMC에 러브콜을 보내는 국가는 일본뿐이 아니다. 이미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인도, 독일, 이탈리아는 자국에 생산 공장을 지을 경우 막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각국이 'TSMC가 기침을 하면 산업계는 감기에 걸린다'는 말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대란에 자동차, 스마트폰 등 각국 주요 기업의 공장들은 일제히 '셧다운'이 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53%에 달했다.

TSMC의 영향력은 실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TSMC의 올해 1분기 실적은 매출 4,910억 대만달러(약 20조8,400억 원), 영업이익 2,237억 대만달러(약 9조4,800억 원)를 기록해 전년 동기보다 각각 36%, 49%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45.6%다.



'귀신섬'으로 불린 대만...TSMC 약진하자 韓 GDP 19년 만에 추월


TSMC의 약진에 힘입어 대만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나 홀로 질주하고 있다. 5, 6년 전만 해도 대만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귀신섬(鬼島)'에 산다고 했다. 귀신섬이란 높은 실업률과 낮은 경제 성장에 절망하며 대만의 미래에는 귀신만 살아남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년 만에 한국을 역전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전년 대비 0.5% 오른 3만4,990달러로 예상된다. 반면 대만의 1인당 GDP는 같은 기간 6% 성장하면서 3만6,000달러 수준으로 전망된다. 한때 '일본의 하청기지'로 불렸던 대만은 이제 일본(3만9,240달러)까지 넘보고 있다.

대만에서 반도체 산업은 '호국신기(護國神器·나라를 지키는 신의 무기)'라고 불린다. 지난해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수출의 37%, 국가 GDP의 17%를 차지했다. TSMC는 대만 대학생들의 '꿈의 기업'이다.



모리스 창 창업자의 선견지명, 이건희 회장도 스카우트 제의


하지만 처음부터 TSMC가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TSMC의 설립자 모리스 창은 1985년 "조국 반도체 산업 진흥에 도움을 달라"는 대만 정부의 부름에 미국 반도체 기업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I)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자리에서 내려와 귀국했다.

미국에서 입지를 다진 그였지만, TSMC를 창업할 때 투자한다는 기업이 없어 고군분투했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주문받은 물량을 생산만 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과 미국의 반도체 대표 기업들은 설계부터 제조, 판매까지 통합·운영했기 때문이다.

창 전 회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산 시설을 갖출 능력은 없지만 자체 설계 기술을 가진 벤처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는 상황에 주목했다. 이들은 양산 능력을 갖춘 종합 반도체 기업에 제품 생산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설계 기업들은 기술 이전을 요구받는 등 상당한 갑질에 시달렸다. 기술 유출도 빈번히 일어났다.

반면 TSMC는 자체 사업 없이 주문받은 물량만 생산하다 보니 기술 유출 우려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반도체 공정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생산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투자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는데 이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었다. TSMC의 등장으로 반도체 생태계가 설계만 하는 팹리스와 이들의 제품을 양산하는 파운드리로 나눠졌다. 이런 선견지명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1989년 대만 출장길에서 창 전 회장을 만나 영입 제안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강조...삼성으로부터 애플 물량 뺏어


TSMC가 지금의 압도적 위치에 오르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삼성전자로부터 애플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생산 물량을 뺏어 온 것이다. 2010년대 초반 TSMC는 애플을 제외한 대부분의 팹리스 기업의 주문을 도맡아 왔다. 하지만 연간 2억 대의 아이폰을 판매하는 가장 큰 고객인 애플은 삼성전자에 AP 생산을 맡겼다. 당시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갤럭시와 경쟁하면서 자신들의 AP 설계 기술이 삼성에 넘어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게다가 그 당시 애플과 삼성은 디자인 특허 소송으로 갈등을 빚었다.

TSMC는 사훈인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을 적극 강조하면서 애플과 비밀 협상에 들어갔다. TSMC는 2011년 100명으로 구성된 연구 개발팀을 미국 애플 본사에 머물게 하며 'A8 프로세서'의 오더를 따냈다. TSMC가 생산한 A8 프로세서는 2014년 9월 '아이폰6'에 들어갔다. 당시 파견 직원들은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하면서까지 보안을 지켰다.

TSMC의 가장 큰 강점은 고객과의 신뢰다. 창 전 회장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업 이래 항상 가볍게 약속은 하지 않았다"며 "일단 수주하면 손실이 나도 감수했다"고 말했다. TSMC 직원은 근무 시간 카메라가 장착된 휴대전화와 USB 장치를 휴대할 수 없으며 회사 서류를 개인 메일함으로 옮기는 것도 금지했다. 또 직원들은 화장실에 갈 때도 카드를 찍어야 한다.

TSMC는 1위 자리를 굳히기 위해 올해에만 420억 달러(약 52조 원)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전년 대비 40% 증가한 규모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에서 첨단 공정인 10나노미터 이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TSMC와 삼성전자뿐이다.



TSMC 외에 UMC, 미디어텍 등도 포진...리사 수, 젠슨 황도 대만계


사실 대만에는 TSMC 외에도 각 반도체 분야에서 순위권 기업들이 줄줄이 포진해있다. 파운드리 분야 3위인 UMC를 비롯해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미디어텍과 노바텍, 리얼텍과 하이맥스 등 세계 10대 업체 중 네 곳이 대만 기업일 정도로 강세다. 패키징 시장에서도 지난해 3분기 기준 상위 5개사 중에 세 곳이 대만 업체다. 설계부터 제조, 반도체 패키징 등 후공정까지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대만계 반도체 분야 스타들도 전 세계 반도체 기업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빅터 펭 자일링스 CEO가 있다. 이들 기업은 대만 TSMC에 물량을 몰아주면서 대만 반도체 영향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중국에 의한 대만해협 위협에 대한 대비책과 관련한 질문에 "플랜B는 없다. 모든 것이 TSMC의 어깨 위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마모토= 최진주 특파원
안하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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