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은 따로 없어야 한다

입력
2022.06.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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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풀린 주말 야구장 풍경이 궁금해 잠실구장을 찾았다. 5월의 푸른 잔디와 꽉 찬 관중석을 보니 프로야구 인기가 떨어졌다지만 그래도 나들이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린이'(LG+어린이)와 '삼린이'(삼성+어린이)가 마이크를 잡고 똑 부러진 응원 메시지를 보내자 관중석에서 아빠ㆍ엄마들의 미소가 번졌다. 경기가 끝나고 좋아하는 선수들이 나오길 기다려 사인볼이라도 '득템'한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려 보며 신이 난 표정이다. 유독 아이들이 많았던 하루, 어린이날도 아닌데 왜? 라는 궁금증이 들어 구단 직원에게 묻자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공동 프로모션으로 매달 마지막주 일요일에 진행하는 '어린이팬 데이'였다고 한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 같아 떨린다"는 시구자 어린이의 소감에 문득 옛 추억이 떠올랐다.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 구단들은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는데 가입비 5,000원을 내면 구단 로고가 박힌 야구점퍼와 모자, 사인볼, 회원증까지 알찬 기념품을 한가득 내줬다. 어린 나이에도 남다른 소속감이 생겨 어깨에 힘을 줬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류동룡처럼 시도 때도 없이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렇게 야구를 접한 나는 충성스러운 팬이 됐고, 야구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야구 기자가 됐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중년 세대가 초중등 시절이던 1982년 프로야구는 태동했다. 캐치프레이즈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구단들이 당장 돈 몇 푼 손해를 감수하고 그들을 극진히 모신 덕에 야구는 성장했다. 어린이팬은 성인이 되면 열혈팬이 된다. 성적이 나빠도 배신하지 않았다.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가 그렇게 버텼다.

고마운 줄 모르고 구단도, 선수도 오만해졌다.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장사는 사양했고, 인기에 취해 미래의 평생 고객들을 홀대했다. 요즘도 어린이 회원이 있지만 가입비(약 6만~8만 원)에 비해 혜택이 줄었다. 몇몇 구단에 문의해보니 코로나19 이전 기준으로 전체 관중에서 어린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10%가 안 됐다.

사인을 많이 하면 희소성이 떨어진다고 했던 이승엽의 현역 시절 발언은 은퇴 후까지 그를 옥죄었다. 사인 요청을 거절하고 퇴근길을 막아선 불청객으로 내몰아 동심을 울렸던 일도 있었다. KT의 간판타자 강백호는 "초등학교 때 사인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기억이 오래 남더라"며 "아무리 바빠도 어린이 팬들에겐 1시간이고 사인을 해준 적도 있다"며 '친절한 스타'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털어놨다.

어린이에 대한 투자는 이 나라 스포츠의 미래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2년간 코로나19로 텅 빈 관중석을 바라본 뒤에야 구단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하다. 요즘 아이들은 온라인에 익숙하다. 모바일 게임, 유튜브 등 굳이 밖에 나가지 않고 기호를 즐길 게 널렸다.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은 30일 이달의 골 수상자로 손흥민도, 해리 케인도 아닌 꼬마 팬 라일리 키스를 선정했다. 5세 소년인 라일리는 지난달 13일 토트넘과 아스널의 EPL 경기 하프타임에 진행된 이벤트에서 페널티킥에 성공했다. 2위가 손흥민을 득점왕으로 만든 23일 노리치시티전 두 번째 골이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포츠는 1년 내내 '어린이팬 데이'여야 한다.

성환희 스포츠부장 hhsu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