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해제되자 '합창 예능' 터졌다

입력
2022.06.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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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 '합창' 예능 열풍...10·20대 오디션 시들
'뜨씽' '악카펠라' '박진영 퍼포먼스 합창' 등  
팬데믹 3년...각자도생에서 공존으로  
" 관계 회복,  함께 성장" 열망이 합창으로


달력에 가사 써 합창한 나문희

893세. JTBC 예능 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 합창단원 16명 나이의 총합이다. '뜨거운 씽어즈' 신영광 PD에 따르면, 이 합창단의 둘째인 배우 나문희(81)는 2절지 크기의 달력 뒷면에 가사를 큼지막하게 적은 뒤 촬영이 없는 날 틈틈이 꺼내 합창 때 부를 노래를 익혔다. 나문희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합창단에 참가했다"며 "노래를 통해 함께 사는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나문희는 배우 김영옥, 우현 등과 함께 영화 '위대한 쇼맨'(2017) 주제곡으로 친숙한 '디스 이즈 미'를 3월부터 두 달 동안 연습해 5월 방송에서 불렀다. 비록 화음은 덜컹거렸지만, 그 화합의 목소리에 시청자의 마음은 움직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영옥쌤과 문희쌤이 손잡고 노래 부르는 모습에 눈물이 그냥 콸콸' '요즘 '뜨씽' 보며 다시 합창 영상 찾아보는 중' 등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안방극장에 울려 퍼진 합창

안방 극장에 '합창'이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다. 최근 한 달 새 '뜨거운 씽어즈'를 비롯해 '악카펠라'(MBC), '박진영 퍼포먼스 합창'(가제·SBS) 등 합창 예능 프로그램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슈퍼스타K'와 'K팝스타' 시리즈로 불었던 10~20대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한풀 꺾이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노래하는 합창 예능이 방송가의 새 유행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각자도생에서 공존으로 놀이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4월부터 불기 시작했다. 2년여에 걸친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으로 정서적 고립감이 심해진 데 따른 반작용으로, 연대감을 회복하기 위해 조화와 화합의 상징인 합창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SBS는 박진영과 손잡고 올 하반기 'K합창단'을 선보인다. 합창하며 퍼포먼스도 함께 보여주는 독특한 합창단으로, 국제 합창 대회에 출전하는 게 목표다. SBS는 16~28명으로 꾸려진 일반인 합창단을 대상으로 지난달 중순까지 지원을 받았고, 박진영은 전국을 돌며 각 지역에서 지원한 합창단을 직접 만나 선발한다. 제작진은 "입학 후 줄곧 비대면으로 만난 대학 동기들끼리 꾸린 합창단을 비롯해 요거트집 사장님, 간호사, 선생님 등 다양한 직업의 단원들이 주말마다 뜨겁게 연습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악역 전문 배우들의 아카펠라

같이 하모니를 맞추는 합창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돼 새로운 만남의 광장을 만들고 있다.

4월 28일 전주영화제 개막식. "모두 살아가는 끝이 없는 길, 고난이 와도 함께하면~" 김준배, 오대환, 이중옥, 현봉식 등 10여 명은 영화 '라이온 킹'의 주제가인 '서클 오브 라이프'를 아카펠라로 불렀다. 아카펠라 단원들이 돌아가면서 노래 한 소절씩 부르면 나머지 단원들이 입으로 소리 내 비트를 찍고 화음을 쌓았다. 악역 전문 배우들이 모여 아카펠라를 한다는 취지에서 2일 첫 방송될 프로그램 이름은 '악카펠라'(MBC)로 지어졌다. TV와 스크린에서 험악하게 비쳤던 이들이 함께 모여 화음을 맞추기 위해 진땀을 빼는 모습이 색다른 볼거리가 될 예정이다. 채현석 '악카펠라' PD는 "팬데믹에 얼굴 마주 보며 소통하는 모습들이 그리웠다"며 "그 마음을 아카펠라에 담아 시청자께 합작의 짜릿함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모든 것을 멈춘 팬데믹, 함께 성장의 열망

팬데믹으로 '코로나 학번'들은 MT를 가지 못했고, 직장인들의 회식 문화도 사라졌다. 오프라인 관계가 뚝 끊기면서 커진 공존에 대한 열망은 합창 열풍의 시대적 땔감이 됐다. '트렌드 모니터' 시리즈를 낸 윤덕환 심리학 박사는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며 "코로나 초기엔 억압적 인간관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리두기가 해방감을 줬지만, 3년 차로 접어들어 관계의 결핍이 커지면서 합창 등의 모임을 통해 잃어버린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멈추면서 성장과 성취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며 "합창이 여럿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면서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의 관심을 받는 것"이라고 평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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