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좋은 소식이 세계 곳곳에서 들려온다. 축구선수 손흥민의 골든 부트(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트로피) 수상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탄소년단(BTS) 백악관 초청, 제75회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 송강호 배우의 감독상, 남우주연상 수상 등 눈만 뜨면 깜작 놀랄 만한 뉴스가 선물처럼 쏟아진다.
우리 문화와 스포츠의 힘이 확실히 달라졌다. 결과 자체도 우수하지만 유연성과 자유로움도 한층 성숙했다. 오랜 노력과 수고의 결실로 이 산업의 저변이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싶다. 성공의 경험이 계속 쌓이니 좋은 에너지가 갖는 파장은 더 커질 것이다.
영화와 스포츠만큼 모든 이들의 관심 대상은 아닐 수 있지만 클래식 음악 시장에도 희소식이 계속됐다. 지난달 29일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장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또 오는 4일 결과를 발표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첼로 부문 결선 진출자 12명 중 4명이 문태국을 포함한 한국인이다. 세계적 콩쿠르를 휩쓴 한국인 이름은 손에 꼽기도 힘들 만큼 많아졌을 뿐 아니라 최고로 꼽는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차석, 종신단원으로 혹은 전설적인 실내악 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연주자들도 많아졌다. 콩쿠르 수상을 권위 있는 영화제나 스포츠 리그 수상에 빗댄다면,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 단원 활동은 세계적 영화·스포츠 산업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 내에서도 좀 더 부각되어야 할 이슈가 있다. 2018년 세계 최고의 실내악 콩쿠르로 손꼽는 런던 위그모어홀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우승을 차지한 에스메 콰르텟의 활동이다. 에스메 콰르텟은 네 명의 여성으로만 이뤄진 현악사중주단이다.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 공연이 피아노 리사이틀, 교향악단의 무대라고 한다면 소수의 애호가들이 찾는 실내악 공연은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다. 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분야는 변화가 적은 편이다. 성별에서 특히 그렇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현악사중주단은 ‘관록 있는, 보수적인,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백인 남성 네 명의 음악’이라고 할까.
에스메 콰르텟은 서양에서도 매우 드문, 여성 네 명으로만 이뤄진 팀이다. 결성된 지 1년 반 만에 권위 있는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유리천장을 깨버렸고, 이후 최고의 음악축제인 액상프로방스, 루체른,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중심 아티스트로 초청받아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면서 실력을 증명했다. 올해 3월부터 떠난 6개 도시 첫 북미투어에서 이들의 공연은 각 극장 최고의 티켓판매 공연으로 기록되는가 하면, 미국 코스타메사 세거스트롬 예술센터는 "한국엔 BTS도 있고, 에스메 콰르텟도 있다!"는 타이틀로 홍보하며 이들의 위상을 소개했다.
에스메 콰르텟의 홈페이지는 이들의 역사적인 행보를 담아낸 기록이다. 어디에서 연주했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연주했는가도 중요하다.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 K.465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각별한 인연으로 집중해온 하이든, 베토벤, 드보르자크, 드뷔시, 코른골트 등 소화하는 음악의 무게가 다양한 데다 진은숙의 현악사중주 ‘파라메타 스트링’이나 크로노스 콰르텟이 해금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여수연에게 위촉한 ‘옛소리’ 등의 레퍼토리도 눈에 띈다. 두 작품은 모두 여성(한국)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라이브로 연주하는 현악기와 미리 녹음된 소리와의 결합, 동서양의 현악기가 만나는 소리의 탐험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겨우 7년 차이지만 에스메 콰르텟만의 정체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대푸가’처럼 정면승부하는 레퍼토리로 내적 충실함까지 채워 가고 있으니 이 팀의 에너지가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
클래식 음악계가 뛰어난 한 명의 해외 콩쿠르 소식에 들썩이던 때가 있었다. 지난 시절 얘기다. 더 이상 한 명이 아니다. 칸영화제를 휩쓴 한국 영화인들의 소식과 월드컵 메인 포스터 중심에 한국 선수의 얼굴이 있는 이때, 한국 음악가들은 클래식 음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실내악 분야에서 획기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에스메 콰르텟은 6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우리에게 이런 연주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