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중위의 유해를 찾아서 가족들의 품으로 꼭 보내주세요."
대통령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2월 18일, 당시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왜관역에서 선거 유세를 펼칠 때였다. 한 초등학생이 단상에 오르더니 윤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이어 그 학생은 윤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한국전쟁 때 실종된 미군의 유해를 찾아달라는 얘기였다. 윤 대통령은 그에게 "아저씨가 꼭 찾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게"라며 화답했다.
당시 단상에 올랐던 왜관초등학교 6학년 유아진(12) 양은 이미 지역에서 유명 인사였다. 지난해 7월 28일 엘리엇 중위의 유해를 찾아달라며 백선기 칠곡군수에게 편지를 보낸 사연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유 양이 편지에서 언급한 엘리엇 중위는 한국전쟁 당시 2사단 38연대 소속으로 참전해 1950년 8월 27일 야간 작전 중 호국의 다리 인근에서 실종됐다. 그의 아내 엘리엇 블랙스톤(당시 23세)과 아들 짐 엘리엇(당시 3세)과 딸 조르자 레이번(당시 2세)이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유해라도 수습되길 바랐지만 아직까지도 유해 발굴 작업은 진행 중이다. 지난 2014년 아내인 엘리엇 블랙스톤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남매는 2015년 5월 부모가 사후에도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그녀의 유해를 호국의 다리 인근 낙동강에 뿌렸다.
엘리엇 중위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2021년 7월 25일, 유 양은 여느 주말처럼 가족과 함께 칠곡군 호국의 다리 일대에서 킥보드를 타고 있었다. 그때 낙동강 둔치에 설치돼있던 추모기념판을 발견했다.
"엘리엇 중위가 누구야?"
평화음악분수에 나오는 분수쇼를 감상 중이던 어머니 이은주(44)씨는 뜬금없는 딸의 질문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엘리엇 중위'라는 이름을 그 역시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함께 인터넷에 찾아보자"며 딸을 달랬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딸의 물음은 계속됐다.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유 양은 좀처럼 가족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곤 유 양은 다시 이 씨에게 물었다.
"엄마, 엘리엇 중위님과 그 가족들이 너무 불쌍한데 도와주려면 어떡해야해?"
"엘리엇 중위님의 유해를 빨리 찾는 게 도와주는 게 아닐까? 네가 빨리 찾아달라고 편지라도 써보렴."
유 양은 곧바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의 편지가 닿은 곳은 백 군수였다. 유 양의 편지를 받은 백 군수는 칠곡 지역 전사자 유해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김동수 50보병사단장과 정주영 칠곡대대장에게 유 양의 편지를 전달했다. 어린 학생의 간절한 마음이 유해 발굴 현장에서 애쓰고 있는 장병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장병들 역시 유 양의 편지를 복사해 지갑에 보관하면서 유해발굴의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유 양의 편지에 엘리엇 중위의 딸인 조르자 씨와 주한 미 대사관에 크리스토퍼 델 코소(55) 대사 대리에게도 전해졌다. 2021년 7월 28일 칠곡군을 통해 유 양의 사연을 듣게 된 조르자 씨는 다음 날인 29일에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는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이 외국 군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젊은 세대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됐다"며 "아버지와 다른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유 양의 아름답고 밝은 영혼이 변하지 않기 바란다"며 "가까운 미래에 한국에 간다면, 직접 만나 안아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난 2021년 10월 델 코소 대사대리는 "나 역시 미국 해병대 출신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고귀한 목숨을 바친 미국인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며 "엘리엇 중위와 유가족들을 위한 유 양의 따스한 마음에 감사하기 위해 작은 선물을 보내며 가까운 미래에 직접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유 양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한 22개 나라 참전용사의 사진이 담긴 사진집을 선물하기도 했다. 유 양의 사연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미국 전역에 소개되기도 했다.
유 양이 낙동강 둔치에 있는 엘리엇 중위의 추모기념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순전히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필연에 가깝다. 칠곡군이 고향인 유 양은 어릴 적부터 호국평화의 도시를 표방하는 군과 학교 덕에 호국활동에 꾸준히 참여해왔다. 지난 2021년 6월 왜관초 5·6학년 학생 230여 명이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영웅을 위해 종이학편지 650여 통을 접을 때 유 양은 직접 그들을 위한 시를 써 낭송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호국보훈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일 좋아하는 과목도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사회"라며 "그 덕에 추모기념판도 보게 되고 엘리엇 중위님의 사연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엘리엇 중위의 추모기념판은 지난 2018년 10월 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을 기념해 제작됐다. 당시 칠곡군의 초대로 방한한 아들 짐과 딸 조르자씨가 이 기념판을 보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칠곡군은 올해 6월 중 추모비도 건립할 예정이다.
편지가 화제가 되면서 유 양의 일상도 소란스러워졌다. 언론사 인터뷰뿐 아니라 아리랑TV, 국방TV 등에서도 출연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처음 유 양은 너무 떠들썩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처음엔 요청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방송이나 보도가 계기가 돼 한 사람이라도 더 엘리엇 중위의 사연을 알게 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출연을 결심했다. 그 덕에 유 양은 지난해 12월에 임영채(13) 양, 육지승(10) 군과 함께 칠곡군 최초로 어린이가 '칠곡군 빛낸 유공자' 표창을 받기도 했다.
유 양이 유명세를 치르다 보니 그의 학교인 왜관초도 들썩였다. 유 양의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수님께 편지를 쓰겠다며 나섰고 몇몇 친구들은 유 양에게 인사 대신 거수경례를 하기도 했다. 유 양은 "저로 인해 역사를 잘 몰랐던 친구들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뿌듯하다"며 "이런 게 선한 영향력 아닐까요?"라며 웃었다.
유 양의 꿈은 경찰이다. 장래희망이 열두 번도 더 바뀔 때지만 현재로선 경찰에 대한 목표가 확고하다. 이유는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어서다. 유 양은 이를 위해 몸과 마음을 꾸준히 수련 중이라며 자랑했다. 얼마 전 태권도 1품을 따낸 그는 틈틈이 낙동강 둔치에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또 다른 꿈도 있다. 바로 엘리엇 중위의 딸인 조르자 씨와 델 코소 미 대사대리를 만나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고 나니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어머니 이 씨가 "그럴려면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텐데"라며 핀잔을 주자 인터뷰 내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이던 유 양이 잠시 멈칫했다.
유세 현장의 인연으로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도 다녀온 유 양은 엘리엇 중위의 유해를 찾기 위해 윤 대통령과 백 군수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했다.
"제 사연이 소개된 기사 댓글 중에 저 때문에 유해발굴단 군인들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용돈을 모아 군인분들에게 아이스크림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할 테니 모든 분들이 힘을 합쳐 꼭 엘리엇 중위의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