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평양냉면 먹는 날

입력
2022.05.31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남들은 서너 차례 들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육성을 처음 접한 건 2015년 1월 1일. 조선중앙TV에서 그의 집권 후 세 번째 신년사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흉내 냈다는 그 말투가 특이해서 놀랐고, 그가 던진 메시지가 쇼킹해서 두 번 놀랐다.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면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는 것. 남북 정상이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신년사를 한 줄 한 줄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을 들어 의미를 잔뜩 부여한 기사를 출고한 뒤, 파김치가 된 몸으로 퇴근하다 헛웃음이 났다. ‘정상회담이 급물살을 탔다’는 기사를 쓴 나조차도 그 말을 믿지 않아서다. 그의 발언은 관심끌기용으로 실현 가능성을 제로(0)로 봤다. 당시는 박근혜 정권. 대통령이 통일 대박론을 외쳤지만 아무도 김 위원장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았다. 곧 없어질 불량국가 김씨 왕조의 3대 세습 독재자이자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처형한 악마일 뿐.

관료들 사이에선 ‘격’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서른을 갓 넘긴 김 위원장과 카운터파트로 마주 앉는 그림이 부적절하다는 것. 야당 대표 시절 김정일과 회동했던 박 대통령이 막내 조카뻘 되는 김 위원장을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다. 김일성, 김정일이면 몰라도, 나이나 연륜에서 한참 뒤지는 김 위원장은 박 대통령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거였다. 나 역시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이 마흔 중반을 넘기는 10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봤다. 보수 정권의 한계이자, 고정관념에 갇힌 나의 한계였다.

계기는 만들기 나름이고, 의미도 부여하기 나름이었다. 누가 알았나. 드라마처럼 3년 뒤 남북 정상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회담을 하고, 김 위원장을 로켓맨으로 비하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그와 세기의 악수를 할 줄.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과 만나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상회담 실현 가능성은? “실질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단 걸 보면 그리 높진 않아 보인다. 당장 7차 핵실험 버튼을 누르려는 북한에게서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찾기 힘들고 성과 없는 보여주기식 만남이 시간 낭비란 말도 맞다.

다만 새 정부에선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보수 정권에서 한 번도 성사되지 못한 회담이라서다. 만남 자체가 새로운 역사다. 빨갱이 논란에서 자유로운 보수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실질적 진전을 이룰 것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모두 실패해서 문제였을 뿐.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회동 날짜까지 잡은 김일성이 급사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운명이 달라졌을 거라고들 한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명을 받은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김양건과 싱가포르 회동에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면 이듬해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같은 비극이 없었을 거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 대통령의 주요 일정에는 민망할 정도로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김치찌개, 꼬리곰탕, 짬뽕, 피자, 빈대떡, 순대, 만두까지. 어떤 날은 먹은 게 전부다. 먹는 것에 진심인 윤 대통령의 식사정치 메뉴에 평양냉면을 추가하는 건 어떨까. 윤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마주 앉아 평양냉면을 먹는 날, 평화가 우리 생각보다 더 일찍 찾아올지 모른다.


정승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