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국부'의 상반된 면모

입력
2022.06.01 04:30
26면
6.1 조모 케냐타

케냐는 독일과 영국 지배를 차례로 거쳐 1963년 6월 1일 자치권을 얻고 12월 12일 독립했다. 전자는 '마다라카(Madaraka, 자치) 데이', 후자는 '자무리(Jamhuri, 공화국) 데이'로 각각 케냐 국경일이다. 영국과의 자치·독립 협상을 이끌며 독립 공화국을 세운 이가 케냐의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1897~1978)다. 그에겐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건국과 경제 부흥을 이끈 정치 지도자라는 칭송과 함께 종신 독재자라는 비난이 뒤따른다.

그는 케냐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 실력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 학교를 거쳐 영국과 구소련 모스크바대에 유학했다. 1차 세계대전 전후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의 세례를 입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1928년 키쿠유 부족연합 사무총장에 뽑혀 제국 자본의 토지 수탈에 저항했고, 여러 차례 런던을 방문해 케냐 독립의 당위를 역설했다. 물론 아무 성과는 없었지만, 그는 한국의 이승만처럼 외교적 해법을 선호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그가 정치조직 케냐아프리카연합(KAU)을 설립해 비폭력 정치투쟁을 이어가는 동안 한편에서는 무장 게릴라 독립운동, 즉 '마우마우(Mau Mau)운동'도 본격화했다. 반영주의자 탄압에 나선 식민지 정부는 케냐타를 체포, 1952년 재판을 통해 7년형을 선고했고 출옥 후 가택 연금당했다. 무장 저항이 가열되면서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된 영국은 케냐타를 협상 파트너로 택했고, 케냐타는 영국인 신변 보장 및 독립 후 영국과의 우호, 친선을 보장하며 독립을 성사시켰다.

공화제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1978년 숨질 때까지 종신 집권하며 일당 독재로 숱한 정적을 탄압했지만, 외국자본 유치와 관광산업 활성화 등으로 경제 안정에 기여했다. 그는 결코 모범적 민주주의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케냐 시민들은 말년의 그를 '음제(Mzee)'라 칭하며 대체로 존경했다. 우리 말로 '어르신(Old-man)'쯤의 의미라고 한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