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건수가 많으면 우수 논문으로 인식되고 해당 논문을 실은 학술지 영향력이 확대되는 점을 악용해, 일부 출판사와 학술지들이 조직적으로 인용 지수를 부풀리는 부정행위를 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특정 학술지들이 서로의 논문을 고의적으로 과대 인용하며 논문 평가 척도인 인용지수를 부풀려주는 '카르텔'의 존재도 확인됐다.
30일 포항공대(포스텍)에 따르면, 포스텍·숭실대·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공동연구팀은 국내 4,000여만 건의 학술 논문을 분석해 특정 학술지들이 논문 인용을 부풀린 실태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공동연구팀에는 포스텍에서 정우성 교수와 유택호 박사, 숭실대 윤진혁 교수, KISTI의 박진서·이준영 박사 등이 참여했다.
예컨대 새로 창간된 A 학술지의 경우 인용지수(특정 기간 한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이 다른 논문에 인용되는 평균 회수)가 통상의 지수보다 1,00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 수준이 그리 높지 않거나 획기적 발견을 담고 있지 않음에도 이 학술지에서만 비정상적으로 인용지수가 높게 나타난 것이다.
문제가 된 A 학술지의 경우는 구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출간하는 게 아니라, 논문 저자에게 비용을 받고 출간을 대행해 주는 잡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동연구팀 관계자는 "노벨상 수상 논문도 이 정도의 인용지수가 나오지는 않는다"며 "인용지수가 높으려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 포착된 학술지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공동연구팀 조사 과정에서는 특정 출판사가 이 같은 인용 카르텔 결성을 주도했을 것으로 보이는 단서도 발견됐다. 인용지수가 정상치를 초과한 학술지 중에서 5분의 1 정도의 학술지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밝혀졌다.
학술지들이 인용을 서로 품앗이하는 카르텔이 형성된 것은 예전처럼 '셀프 인용'으로 인용지수를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연구팀은 "과거에는 학술지들이 자체적으로 논문을 인용하는 셀프 방식으로 인용지수를 높였지만, 검열 강화로 이것이 불가능하자 출판사 차원에서 학술지를 서로 인용하는 부정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출판사 한 곳이 여러 개의 학술지를 거느리며 각각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서로 인용하는 방식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인용지수가 지나치게 높은 학술지를 펴낸 특정 출판사는 400곳 이상의 학술지와 출간 계약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용 지수가 높은 학술지 입장에서는 인지도와 영향력이 확대되고, 논문 저자에게 출판료를 받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 수가 많을수록 이익이 늘어난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출판사와 학술지가 결탁한 것이다.
공동연구팀은 신뢰할 만한 척도로 인식됐던 논문 인용지수를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고 해석했다. 지금까지는 인용 지수를 질적 평가로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부정행위가 개입 가능한 양적 지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정우성 포스텍 교수는 “선량한 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부실 학술지와 출판사를 조치해야 한다”며 “양적 성과 중심의 학술 평가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연구팀의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저널 오브 인포메트릭스'(Journal of Informetrics)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