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파시즘의 뿌리

입력
2022.05.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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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슈트라서주의

파시즘이 극우 파시즘의 줄임말처럼 쓰이게 된 까닭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이미지가 워낙 드셌기 때문이다. 전후 냉전 영향도 있다. 서방 세계가 '빨갱이'를 절대악과 같은 존재로 대상화한 탓에 굳이 파시즘까지 덮어씌울 필요가 없어서다. 하지만 좌익 파시즘은 엄연히 존재했고,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이념과 동떨어진 여러 면모들도 좌익 파시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슈트라서주의(Sutrasserism)'는 냉전 이전 좌익 파시즘의 상징적 예다. 히틀러 이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좌파 지도자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Gregore Strasser, 1892.5.31~ 1934.6.30)의 이름에서 따온 용어로, 독일 민족(국가) 중심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반서구·반금융자본주의를 포갠 이념이다.

나치당은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독일제국이 패망한 직후인 1919년 창당됐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가혹한 전쟁 책임을 부과한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반발, 짓밟힌 아리안족 긍지의 회복이었다. 독일 북부 노동자 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한 슈트라서는 구체제 자산을 몰수해 프롤레타리아에게 분배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서구화 정책에 맞서 동방화, 소비에트화를 지향했다. 그는 생산적 자본주의가 아닌 금융자본주의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맥락에서 금융업에 치중한 유대인을 배척 대상으로 상정했다.

슈트라서는 1923년 뮌헨 폭동으로 히틀러를 비롯한 당 지도부 다수가 체포·투옥된 직후 동생 오토와 함께 당권을 장악했지만 대공황 이후 선거 국면의 권력투쟁에서 결국 패배했다. 나치당은 1932년 7월 총선거에서 압승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듬해 1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선거로 이루지 못한 완벽한 권력 장악을 위해 히틀러는 6월 30일, 대대적 정적 숙청(일명 '장검의 밤')을 감행했고,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