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해방 아닐까요?" 안방 울린 '미정 엄마'

입력
2022.05.30 04:30
20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삼남매 엄마 이경성
"엄마의 해방이 가족 해방의 밑거름"  
인공관절 묻는 극중 아들 얘기하며 눈물
"희망은 늘 절망의 맨 밑바닥에 숨어 있어"
오영수·손숙과 국립극단서 함께 활동 
"김밥 말고 보험회사 다니며" 연기 병행
내달 '툇마루가 있는 집'으로 다시 무대로

편집자주

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엄마'가 죽었다. 가스 불에 쌀을 안친 뒤였다. 엄마는 잠시 쉬러 방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아 진짜, 밥 다 탔어. 어? 밥 다 탔다니... 엄마?" 아들이 안방으로 걸어가며 내놓은 불평은 순식간에 비탄으로 바뀌었다. 큰딸은 갑자기 눈을 감은 엄마를 두고 "분명 과로사"라고 단언했다.


"365일 빨간날이 없어" 갑작스러운 사망일지

29일 종방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혜숙(이경성)은 늘 고단했다. 밭에서 대파를 뽑고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남편(천호진)과 자식들(이엘·이민기·김지원) 밥을 챙기느라 집에 수십 번을 들락거리며 가스 불을 켜고 껐다. "당신은 숟가락 딱 놓고 밭으로 공장으로 가면 그만이지, 나는 365일 빨간날이 없어." 혜숙은 가족에게 속박돼 해방이 시급한 우리네 어머니의 자화상이다. 가족에 반평생을 갇혀 산 혜숙이 21일 방송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엄마는 죽어야 해방된다. 이 드라마의 현실성이 가슴을 후벼판다' 등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갑자기 왜 죽은 거냐고 카톡이 쏟아지더라고요. '이제 해방됐다'고 했죠. 어른들이 그런 말씀 많이 하시잖아요, 죽어야 끝난다고. 엄마들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아요. 저도 애 둘 키우면서 일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어질러져 있으면 어떨 땐 진짜 헛웃음이 나왔거든요. 촬영하는데 밥상이 너무 잘 차려져 있는 거예요. 밥상을 네 번 차린 적도 있고요. 그래서 '감독님, 이 엄마 일하면서 어떻게 이런 이 밥상을 차릴까요'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2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본보와 만난 이경성(58)의 말이다. 그는 "존재감 없이 살아온 엄마가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크게 발휘된 게 아이러니"라고 했다.


엄마의 인공관절로 '기념식수'

혜숙이 죽은 뒤 아들 창희(이민기)는 집 뒷산에 엄마의 무릎 인공관절을 묻는다. 화장 후 남은 엄마의 고달팠던 삶의 흔적이다. 창희는 장례 기간 그의 옆을 지킨 친구 현아(전혜진)에게 화장터에서 "결혼하자"고 청혼한다. 혜숙이 떠난 뒤 그의 자식들은 경기 산포를 떠나 서울로 갔고, 남편은 밭을 팔고 공장을 닫은 뒤 재혼한다. "혜숙의 죽음이 엄마만의 해방이 아니라 가족 해방의 밑거름이 됐잖아요. 남편이 너무 빨리 재혼해 처음엔 그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남편이 빨리 재혼해야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시골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경성은 극중 아들인 창희 얘기를 하며 눈물을 떨궜다. 13회에서 시장에서 장을 보다 딸인 미정의 결별 소식을 뒤늦게 듣고 골목길에서 우는 엄마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 중 하나다.


한석규와 대학 동기였던 '대학로 유망주'

이경성의 드라마 외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해방일지' 제작 관계자가 지난해 4월 이경성이 나온 연극 '구멍'을 본 뒤, 그를 드라마에 캐스팅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한석규와 동기인 이경성은 대학로의 유망주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뒤 1987년 국립극단에 입단해 7년여를 단원으로 무대에 올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한국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탄 오영수와 손숙 등과 함께 활동하던 때였다. 이경성은 "제가 그때 국립극단 막내였다"며 웃었다. "'맹진사댁 경사'에서 주인공 이쁜이 역에 캐스팅돼 연습을 했는데, 뛰는 장면이 있었어요. 백성희 선생님이 '너 임신했는데 영 불안하다'고 다음 기회를 보자고 해서 하차했죠. 제겐 경사였는데 기회를 놓쳐 많이 울었죠."


"김밥 말며 연기" 남편 떠난 뒤 찾아온 기적

1986년 극단 광장의 연극 '어두워질 때까지'로 데뷔한 이경성은 올해 36년 차 배우다. 대학로에서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여느 연극배우처럼 그도 "김밥집에서 김밥을 말며"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이경성은 "맞벌이였는데 아이들이 커 한창 공부할 때 학원비를 마련하느라 보험회사에 취직도 했다"며 "회사 출근길에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갈아타려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드라마에선 늘 그늘졌던 배우는 웃음이 많았다. 이경성의 요즘 취미는 "합창"이다. 4년여 전부터는 사투리 연구 모임도 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이경성은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6월24일~7월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습실로 향했다. 오래전에 살던 집이 허물어지기 전, 관련 인물들이 옛일을 떠올리며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경성은 주인공 남자의 과거 엄마와 현 아내,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밀양연극제에서 세트도 만들었는데 코로나로 공연 일주일 전에 취소돼 1년 동안 묵힌 뒤 이제서야 개막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2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든든한 지원군이었죠. '나의 해방일지'도 제일 좋아했을 사람인데...'희망은 늘 절망의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는 카톡을 지인이 보내줬어요. 힘들 때 '나의 해방일지'를 만났는데 우연은 없는 것 같아요."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