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친원전 드라이브’로 향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발생량이 기존 예상치보다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선 당장 10년 안에 포화가 예상되는 방폐물 임시 저장시설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방폐물 처리장이 대표적인 '님비(Not In My Back Yard)' 시설로 꼽히는 걸 감안하면 최종적인 영구 방폐물 처분시설 완공까지는 30년 넘게 걸릴 거란 우려가 적지 않다.
2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새 정부의 원전 활성화 정책에 반드시 수반돼야 할 방폐물 최종 처리시설 확보까진 갈 길이 멀다. 관련 특별법 제정은 물론, 관리시설과 부지 선정, 인근 지역주민의 우려 해소까지 무엇 하나 순탄해 보이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첫 단추로 꼽히는 특별법 제정 작업부터 지지부진해 자칫 수년 뒤 방폐물 처리 대책이 없어 원전을 돌리지 못하는 상황까지 몰릴 수 있다는 게 업계의 경고다.
실제 고준위 방폐물 임시 저장시설 포화에 따른 '원전 셧다운' 가능성은 날로 높아지는 실정이다. 원자력진흥위원회가 지난해 말 작성한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보면, 최종 저장시설 한 곳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까지 총 37년의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원진위는 부지 제공을 희망하는 지방자치단체 공모와 부지적합성 조사, 주민투표 등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만 13년, 부지 확보 후 중간 저장시설을 건설하는데 추가로 7년(총 20년)이 소요될 걸로 봤다. 이후 지하 연구시설 건설 및 실증연구까지 마치는 데는 추가로 7년(총 27년), 최종 저장시설 건설까진 최대 10년(총 37년)이 더 걸린다는 것이다.
원자력환경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고준위 방폐물 영구 처분시설을 세계 최초로 건설 중인 핀란드 사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런데 핀란드가 활용하는 다중방벽시스템은 지하 부지 조사부터 선정까지 17년, 건설 허가까지는 20년 넘게 걸렸다.
여기에 윤석열 정부의 친원전 정책으로 임시 저장시설 포화 시점은 더 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루빨리 방폐물 처리장 건립 작업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차기 정부로 갈수록 사태의 심각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우리나라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가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후 44년 동안 최종 저장시설 건립은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2030년 전후 포화가 예상되는 고리·한빛 원전의 고준위 방폐물을 받아 줄 중간 저장시설 건설에도 앞으로 20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도 늦었다는 평가다. 더 늦어질 경우 자칫 원전 생태계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조차 공론화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의견이 갈린다. 현재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 대표발의한 특별법안(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갈지, 아예 새 법안을 만들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해당 법안은 임시 저장시설 용량을 ‘설계 수명 이내 가동분’으로 제한하고 있어, 사실상 원전의 연장가동 가능성을 닫아두는 독소조항”이라며 “행정위원회를 두자고 명시한 점도 오히려 원전 정책의 정치화를 부추길 수 있어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특별법 제정을 넘어서도, 부지 선정 갈등이란 큰 산을 넘어야 한다. 부안군수의 독단적 방폐장 유치 추진으로 지역 내 유혈 충돌과 학생들의 등교 거부까지 이어진 2003년 ‘부안 사태’를 비롯해 1990년 태안 안면도, 1994년 인천 굴업도 등 부지 선정 좌절의 역사는 꾸준히 반복됐다.
부안 사태 이후 정부는 고준위 방폐물에 비해 방사성 오염이 적은 중·저준위 방폐물(원전 작업복 등) 처리장을 따로 세운다는 원칙을 세웠고, 2007년 주민투표 결과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북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 설립을 확정하는 결실을 거뒀다. 그러나 고준위 방폐장 설치는 중·저준위 방폐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전문가들은 고준위 방폐장 확보는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안전성이 철저히 확보되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소멸 위기를 겪는 지방자체단체에는 지역 재건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황주호 원진위원장은 최근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춘계학술발표회에 참석해 “(갈등과 좌절이 반복된) 과거를 답습하지 말고 제대로 된 절차와 정책의 틀을 짜야 한다”며 “이제 단기 문제 해결을 위한 원포인트 법안이 아닌 제대로 된 틀을 갖춘 법안을 만들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