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1973년 임신 중단을 헌법상 권리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연방 대법원 판결문 초안이 유출되면서 미국에서는 임신 중단권 논쟁이 뜨겁다. 새 정권 출범,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굵직한 뉴스가 많아 한국 독자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것 같아 몇 가지 단상을 적어본다.
임신 중단권이 선거 때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첨예하게 맞서는 쟁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이 이슈에 대한 여론이 심하게 갈려 있을 것으로 짐작하기 쉬운데, 여론조사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 중단이 허용되거나 불법이어야 한다는 극단적 견해는 드물고 대다수 미국인은 상황에 따라 보장되어야 한다는 실용적 태도를 취한다. '로 대 웨이드' 판결도 70%는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심각한 정치적 양극화는 현실이지만, 대중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태도는 이처럼 크게 양극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으로 동성애 등 주요 이슈에 대한 여론은 오히려 동질화되는 경향도 있다. 다양한 이슈들에 일관되게 당파적 견해를 가지는 현상은 엘리트와 활동가들 사이에 주로 나타나는데, 이들의 당파적 견해는 언론, SNS를 통해 증폭되어 마치 사회 전체가 첨예하게 대립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또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임신 중단권에 대해 큰 의견차이가 없었고 1990년대 이후에야 당파적 이슈로 등장했는데, 이 배경에는 보수적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와 그 잠재력에 주목한 공화당의 전략적 선택이 있다. 보수적 기독교 세력은 보수성향 정치인의 당선과 연방법관 임명을 위한 운동에 큰 역할을 해왔고, 보수파가 우세한 현재 연방 대법원은 그 노력의 성과다. 조직된 시민의 힘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라는 말은 맞지만, 그 힘이 꼭 사회를 다수 의견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총기 소지자와 사업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전미총기협회도 다수 의견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는 데 성공한 사회운동의 사례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는 미국 사회에서 소수가 되어가는 백인 중심 보수적 기독교 세력은 조직력과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치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관을 사회 전반의 도덕적 질서로 유지하려 해왔고, 그 노력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임신 중단권이 여성의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성별 간 큰 태도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뜻밖에 성별 차이가 크지 않다. 임신 중단권에 대한 견해는 개인의 성별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에 대한 가치관과 더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어, 이에 대해 전통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일수록 성별에 상관없이 임신 중단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임신 중단권을 둘러싼 갈등은 미국 사회가 이루어 온 성평등 관련 진보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 사회의 반격으로 볼 수 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후 가부장제가 인류 역사를 지배해왔고 지금 서구 민주사회가 누리는 정도의 성평등은 인류사에서 극히 최근에 이루어진 진보인 셈인데, 반세기 전 판결로 한 세대의 미국 여성들이 평생 누려 온 권리가 하루아침에 불법행위가 될 위험에 처한 현실은 그 진보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