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생각해 보자. 여기 고려시대 전쟁사를 전공한 30대 중반의 역사학자가 있다. 그는 오지랖도 넓어서 자기 전공 분야 외의 역사책뿐만 아니라 과학책 읽기도 즐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읽었던 책을 잘 엮으면 인류의 역사를 그럴듯하게 재구성할 수 있겠다!' 그 역사학자가 '인류'라는 책을 펴냈다면, 출판 시장의 반응은 어땠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야, 학계를 포함한 대다수 독자가 이런 어쭙잖은 시도를 비웃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가 내놓은 결과물이 몇 권의 '2차 문헌'을 그럴듯하게 짜깁기한 것이고, 나아가 해당 분야 전공자가 보기에는 최신 연구 성과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부정확하고 불성실한 것이라면 더욱더 그랬을 테다.
그런데 비슷한 책 한 권은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화제작이 되더니 국내에서도 여러 지식인에게 '명저'로 칭송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맞다. 유럽 중세 전쟁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1976년생)가 쓴 '사피엔스'(김영사 발행) 얘기다. 인류의 역사를 '상상력'이란 키워드로 재구성해 그럴듯한 이야기로 엮어낸 이 책은 재미를 걷어내고 나면 함량 미달이다.
'사피엔스'가 성공하면서 생긴 긍정적 효과가 있긴 하다. 하라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식견을 가진 일급의 저자가 이런 접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함께 살펴볼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와이즈베리 발행)도 그 한 예다. 장담하건대 그도 (단 한 차례도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사피엔스'의 성공에 자극받았음이 틀림없다.
브라이언 그린이 누군가. '엘러건트 유니버스' '우주의 구조' 같은 책으로 현대 물리학, 정확히 말하면 책 제목처럼 우주의 구조를 해명하는 우주론을 정확하고 유려하게 소개하기로 이름난 과학자다. 그가 '엔드 오브 타임'에서는 세상의 시작(빅뱅)부터 끝까지, 심지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끝의 이후'까지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약 138억 년 전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세상의 온갖 물질을 구성하는 (수소, 산소, 철 같은) 원소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그 와중에 태양과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서 생명, 마음(의식), 상상(언어와 이야기), 종교, 예술의 탄생까지 말하고 나서 '영원의 꿈'을 배반하는 세상의 끝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린은 이 모든 과정을 '엔트로피'(열역학 제2 법칙)와 (자신이 확장해서 사용하는) '진화' 두 가지 과학 법칙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한다. 세상만사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이런 시도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과학책 독자로서 말하자면, 현대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 마치 잡채처럼 맛있게 요리되어 있다.
읽다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다.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및 수학과 교수이자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 불리는 최신 우주론의 대가인 과학자도 약한 대목이 있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마음, 상상, 종교, 예술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갈피를 못 잡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에서 나는 많이 웃었다.
인상적인 대목도 있다. 과학에 문외한인 역사학자의 책('사피엔스')에 온갖 확언이 자주 등장하는 반면 정작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펴낸 이 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모른다'와 '믿는다'이다. 현대 과학은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그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역설!
*글머리에서 '사피엔스'를 폄훼했으니 몇 마디 덧붙이는 게 예의일 듯하다. 인류가 왜 수많은 동물 가운데 이렇게 돋보이는 성취를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은 조지프 헨릭의 '호모 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뿌리와이파리 발행)이다. 물론 '사피엔스'보다 재미는 없다. 재미만 놓고 보면 '사피엔스'보다 즐길 거리는 한둘이 아니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