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에게 필요한 공을 제공하기 위한 토트넘의 십자군 전쟁" (영국 일간 가디언)
"손흥민이 득점왕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팀 동료들의 의지와 열망에 감사하며 보기 좋았다. 좋은 선수일 뿐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다" (안토니오 콘테 토트넘 홋스퍼 감독)
손흥민(30·토트넘)의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소식은 의외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그중 가장 진하게 다가오는 건 다름 아닌 '동료애'다. 우리 사회에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개인주의 성향이 팽배해지면서 '애사심' '동료애' 같은 단어는 희미해진 지 오래다. 우리나 남보다 '나'에 집중하는 시대가 되면서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중시하는 '워라밸'의 보장 여부가 직장 선택의 중요한 요건이 됐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을 위해 그의 '직장 동료'들이 보여준 정성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가혹할 정도로 잔인한 프로의 세계에서 경쟁이 아닌 우정이라니, 동화 같은 얘기이기 때문이다. "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 "팀 동료들이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다" "나 개인보다 팀이 더 중요하다" 등 손흥민의 인터뷰 단골 멘트가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아시아인에겐 불모지인 유럽 축구 빅리그에서 손흥민을 향한 동료애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22일(현지시간) 영국 노리치의 캐로 로드에서 열린 토트넘과 노리치시티의 '2021-2022 EPL' 최종 38라운드에서 손흥민이 득점왕에 쐐기를 박은 23호 골을 터트렸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이가 있다. 코너킥과 프리킥 전담인 손흥민을 대신해 이날 프리킥으로 스물세 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동료, 바로 루카스 모라(30)다.
손흥민과 동갑내기인 모라는 이날 손흥민의 22호 골을 환상적인 어시스트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23호 골까지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이날 시즌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골을 터트린 손흥민을 번쩍 들어 올리며 동료의 업적을 축하하는 모습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활짝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자주 포착됐다.
이날 경기를 시청한 김혜은(38·가명)씨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김씨는 "모라가 손흥민을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정말 눈물이 날 뻔했다"며 "그동안 골 욕심을 내던 모라를 비난했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사실 팀 내 모라의 상황은 좋지 않다. 특히 1월 데얀 클루세브스키가 영입된 이후 모라의 자리는 더 좁아졌다. 심지어 이달 초 영국 컷오프사이드에 따르면 모라는 다빈슨 산체스(26), 해리 윙크스(26) 등과 함께 '방출 후보'로 보도되기도 했다. 클루세브스키가 손흥민, 해리 케인(29)과 빠르게 호흡을 맞추면서 선발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모라는 자신이 골을 잡고 해결하려는 스타일인 반면 클루세브스키는 공격진에 볼을 배급하는 보다 이타적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러다 보니 모라가 공을 잡고 있으면 "손흥민에게 볼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 팬들의 원망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는 '손흥민 득점왕 만들기'에 누구보다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감동까지 전했다.
네덜란드 출신 스티븐 베르바인(22)도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다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리 웃을 수만은 없다. 그는 현재 손흥민에게 가려져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 베르바인은 손흥민이 지칠 때쯤 체력 비축을 위해 교체하는 선수로 전락해버렸다. 오죽하면 자신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하고 싶어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베르바인은 자국 대표팀에선 펄펄 나는 '잘나가는' 선수다. 2022 카타르월드컵 예선에서도 경기마다 활약하며 네덜란드를 본선 진출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른 팀에서 주전으로 손색 없는 선수가 손흥민에게 밀려 '교체 선수'로 그라운드에 나서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지 알 만하다.
그럼에도 손흥민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다. 베르바인은 7월 토트넘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손흥민과 한국어로 관련 영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한국 갑니다" 등 손흥민이 읽어주면 소리나는 대로 따라하는 모습에 "한국어가 유창하다"는 칭찬도 듣고 있다. 손흥민의 격의 없는 친화력이 한몫했다. 나이 어린 선수들과도 터놓고 지내는 '좋은 형' 면모가 발휘된 것.
손흥민이 모든 걸 뛰어넘어 동료로 인정받은 원동력은 무엇일까. 토트넘의 2000년생 유망주 라이언 세세뇽의 인터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세세뇽은 최근 영국 이브닝스탠다드와 인터뷰에서 '손흥민이 월드클래스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손흥민은 지난 6, 7년 동안 일관성을 유지한 최고 수준으로, 각종 수치를 통해 그가 월드클래스라는 걸 증명한다. 왜 과소평가받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이어 "손흥민이 겸손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며 "오만하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해서 밖에서 과소평가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토트넘의 수비수 에릭 다이어(28)도 손흥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 손흥민이 득점왕이 된 이날 경기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과 사진 때문이다. 다이어는 "23골(노 페널티)"이라고 적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 짐 캐리의 사진을 올렸다. 그 밑에는 잉글랜드프로축구선수협회(PFA)가 20일 발표한 올 시즌 팬 선정 '올해의 선수' 후보 리스트를 링크했다.
해석을 하면 이렇다. 페널티킥(PK) 없이 필드 골로만 스물세 골을 넣은 동료 손흥민이 왜 올해의 선수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는지 의아하다는 의미다. PFA가 올해의 선수 후보를 발표했을 당시 일부 영국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손흥민이 득점왕에 오르면 바보가 될 것"이라고 PFA를 맹비난했다. 또한 후보에 오른 케빈 더 브라위너, 필 포든(이상 맨시티), 모함마드 살라흐,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이상 리버풀), 데클란 라이스(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코너 갤러거(팰리스) 등 6명 중 4명이 잉글랜드 출신 선수라 편파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아쉬울 수밖에 없는 건 손흥민이 올 시즌 축구 관련 단체에서 뽑는 '올해의 선수'에서 모두 미끄러져서다. 그는 앞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 선정 올해의 선수 후보에는 올랐지만 상은 더 브라위너에게 돌아갔다. 지난달 잉글랜드축구기자협회(FW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은 살라흐가 받았다.
그러자 팬들도 다이어의 지적에 반응했다. 토트넘 팬사이트 스퍼스웹은 다이어의 SNS를 인용해 "손흥민만큼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며 "그가 페널티킥 없이 살라흐와 득점왕 트로피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밝혔다.
한때 다이어는 국내 팬들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경기 도중 손흥민에게 소리치며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논란이 됐다. 영국 언론들도 당시 상황을 거론하며 팀 내 불화설까지 제기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손흥민에 대한 진한 동료애를 유감없이 보여줘 국내 팬들에게 오해가 풀린 듯하다.
해리 케인과 피에르 에밀 호이비에르(26)도 손흥민의 득점왕 등극을 SNS로 한 번 더 축하했다. 케인은 손흥민과 득점왕 트로피를 들고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손흥민은 득점왕에 오를 자격이 있다. 올 시즌 전혀 다른 클래스를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호이비에르도 SNS를 통해 "쏘니! EPL 득점왕의 주인공이 된 것을 축하해! 우리는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적으며 동료애를 과시했다.
토트넘을 떠난 옛 동료까지 손흥민을 챙겼다. 에버턴으로 이적한 델레 알리(26)도 토트넘 시절 손흥민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자랑스러운 나의 형제"라는 글로 여전한 우정을 뽐냈다. 사실 두 사람은 토트넘서 한솥밥을 먹으며 우정을 쌓았고, 손흥민은 지난달 알리가 이적 후 첫 생일을 맞았을 때도 만나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현재 부상으로 이번 시즌을 마무리한 팀 동료 맷 도허티도 SNS에 "쏘니(Sonnyyyyyyyyy)"라고 쓰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토트넘의 모든 팀원들이 손흥민에 동료애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된 건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항상 겸손해야 한다" "손흥민은 월드클래스가 아니다" 등 아버지 손웅정씨의 가르침을 받은 아들 손흥민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