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석유산업이 유례없는 초호황을 맞았는데도 정유사업 자체는 빠르게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탄소중립 정책과 맞물려 수소 등 차세대 에너지로의 전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석유기업들이 40~50년 된 정유공장에 재투자하는 대신 아예 공장 가동을 멈추면서다.
공교롭게도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에너지 대란'과 맞물리며 심각한 공급난을 촉발했다. 탈탄소 정책에 외면받던 석유 정제시설이 에너지 안보의 한 축으로 부상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고 있다.
24일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석유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정제시설 순증설 규모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지난해 하루 85만 배럴의 석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정제시설이 증설됐는데, 폐쇄된 정제시설 규모는 이보다 배 가까이 많은 160만b/d(하루당 배럴)에 달했기 때문이다.
정제시설은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와 같은 석유제품을 만드는 설비다. 현재 세계 각국의 정제공장은 완공된 지 40~50년이 지난 노후공장이 전체의 30%를 웃돈다. 새로운 유전이 잇따라 발견되며 정제시설 증설 붐이 일었던 1960년대 지어진 공장들인데, 당연히 시설 노후화가 심해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다.
전기차 시장의 급성장과 탄소중립이 전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자 석유기업들도 정제시설 재투자를 꺼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석유산업이 단기 호황을 맞았지만 일찌감치 기존 정유공장을 접고 다른 에너지 산업에 투자하는 게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지난달 글로벌 메이저 석유화학 회사인 라이온델바젤은 미국에서 최대규모로 손꼽히는 휴스턴 정제공장(일평균 26만8,000배럴 생산)을 내년 말까지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로 104년 된 이 공장을 유지하려면 수억 달러의 재투자가 필요한데, 투자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일본 최대 석유회사인 에네오스(Eneos)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정유공장(와카야마) 한 곳을 폐쇄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정유 대신 친환경 항공유(SAF)나 수소 생산공장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정유업계는 앞으로 노후 정제시설 폐쇄 속도가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본다. 반면 신규 투자는 더뎌 지금의 공급난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당장 올해 정제설비 순증설 규모는 130만b/d로 추산되는데, 이는 잠재수요(244만b/d)에 크게 못 미친다.
이 때문에 세계 톱5 안에 드는 정제시설을 3곳이나 보유한 국내 정유업계가 반사이익을 누릴 거란 기대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호주에서 정제시설이 잇따라 문을 닫은 여파로 국내 정유사의 호주 수출 물량이 1년 전보다 50% 급증했다"며 "최근 줄어든 국내 수요를 해외 수요로 만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 탄소중립 흐름에도 2050년까지 석유 수요가 견조할 거란 전망이 잇따르면서 석유 정제산업을 에너지 안보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석유제품 수입 의존도가 60%에 달했는데, 최근 주요 정제공장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에너지 안보에 비상이 걸렸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