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아무래도 아직은 봄이지요" 한다면 "맞아, 봄이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누군가 책상을 꽝 치며 일어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건 여름이오!"라고 외친다면 "그래, 아무래도 여름이지…"라고 수긍하며 땀을 닦아낼 수밖에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동물처럼 단 하나의 계절로 정의하기 어려운 낮과 밤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덧 빨간 장미가 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으니 오월인 건 확실하다.
겨울에는, 그러니까 오후 다섯 시면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계절에는 너무 잦은 허기처럼 우울이 찾아온다. 불행 중 다행은 내가 시커먼 먹색일 때 세상도 적당한 재색이라 계절과 내가 같은 속도로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가 길어지면서 계절과 나 사이의 속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2.5보를 잰걸음으로 걸어도 잡아챌 수 없었던 바쁜 엄마의 보폭처럼 계절은 급격히 쾌활해지고 내 우울은 성큼성큼 뒤처진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빛깔의 옷을 걸쳤을 때 낯빛이 어두워 보이듯, 이 환한 계절에는 유난히 내 안의 우울이 더 칙칙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세상사가 그렇듯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 거다. 그건 뉴스를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과학이나 의학은 대략 인류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발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까지는 이게 맞았는데 오늘은 아니다더라'가 자주 일어나는 분야 같다. 따지고 보면 인류가 해온 일들이란 대체로 앞으로 가긴 가는데 어쩐지 술 취한 사람의 행보에 가까우니까. 나는 그 지그재그 속에서 내게 필요한 뉴스를 찾아보는 게 정신 건강에 매우 좋다는 걸 알고 있다. 설사 그게 내일 뒤집히는 한시적인 뉴스더라도 말이다.
역시, 의학계는 겨울철보다 20%가량 높게 나타나는 봄철 자살률을 가리켜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는 용어를 이미 만들어놓았다. 부지런한 의학계 만세. 스프링 피크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아직 연구 중이지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햇빛에서 찾는다고 한다.
일조량이 늘어나면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혈중 수치가 늘어나면서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던 사람은 봄이 주는 활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우울증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 ‘봄을 탄다’는 건 사실 ‘우울증이 악화됐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다. 이름을 가진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그전처럼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을 본 것도 같은데. 그게 맞다면 나는 친구들에게 외치고 싶다. "있잖아, 지금 우울한 건 햇빛 때문이래! 스프링 피크라는 이름도 있다고! 지나가는 거래! 물론 또 겨울이 오고,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날 테고, 많은 일들이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하여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이건 우리 탓이 아니고 해님 탓이야!"
사람은 생각이 깊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연느님'(김연아)의 말씀처럼 "무슨 생각을 해, 그냥 사는 거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다만 그냥 사는 데에도 방법은 필요하다. 사람이란 어찌 된 일인지 일 없이 가만히 누워있으면 생각이란 걸 하고, 지난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같은 걸 헤아리며 자신을 깊고 어두운 상념의 바다로 끌고 들어가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뿐인데 세상이 우리에게 감당키 힘든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던질 때 생각을 덜어내는 방법조차 검색해야 해서, 그러다가 습관처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켜서, 홀린 듯이 누군가를 너무 높게 보거나 낮게 보려는 마음이 생겨날 때,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작가가 달리기를 권한다. 아무런 장비가 필요하지 않고 오직 뛰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그 운동. (물론 당신이 달리기를 계속하게 된다면 한국인의 고질병인 '장비병'에 걸리게 될 테지만 기구나 장비, 동료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는 다른 운동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달리기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원하는 곳에서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칙이 없으니 스트레스가 없는 운동이에요. 필라테스는 회당 8만 원으로 30회를 등록하는 데에 수강료만 200만 원이 들었고, 수영은 생리 때문에 할 수 없는 기간에 대한 비용을 빼주지 않더라고요. 그에 반해 달리기는 신발 한 켤레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죠. 1년째 지속하고 있는데 신발 외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워요.” 회사에서 사람에 치여, 사람을 그만 만나고 싶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성산동 거주자 김수진씨의 달리기 예찬을 듣고 있자면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내가 오늘 밤에라도 당장 달리러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같다.
한편 체중계 숫자 때문에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체중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5년 차 러너 이혜미씨는 달리기가 "움직이는 신체로서의 감각을 자각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달리기를 시작한 뒤 미용이나 날씬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강박이 사라졌어요. 여성이라는 육체를 인간이라는 육체로 환원하여 인식하게 된 거죠. 몸은 ‘영혼의 우주복’이라고 시(詩)로 쓰기도 했어요. 하루에 10km씩 한 시간 넘게 달리다 보면, 몸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게 아닌 ‘영혼의 탈것’으로 인식하게 되죠. 우리의 몸은 지구를 여행하는 동안 벗을 수 없는 우주복과도 같으니까. 이 우주복의 성능을 향상시켜 영혼이 잘 기능할 수 있도록 계속 달리는 거예요.”
그의 말끝에서 나는 문득 내게 할당된 하나뿐인 우주복을 내려다본다. 왜 더 호리낭창할 수 없는지, 왜 자꾸 파업을 일으키는지, 왜 영혼을 귀찮게 구는지 같은 부당한 원망을 들으면서 낡고 구멍 나버린 내 가엾은 ‘영혼의 우주복’. 미안해라. 나도 우주복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싶다…! 이제서야? 갑자기?
사는 동네에서 매일 달리는 두 사람은 달리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입을 모으며 달리기 세계로의 초대권을 후드득 날린다. 퇴근 후 성산동 천변에서 한강까지 달리는 김씨는 “달리기를 시작한 후 매일 보는 동료들에게 얼굴이나 몸짓에서 활력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직접 몸을 움직여 에너지를 생성하는 달리기는 일상적인 행동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끼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며 오늘도 '운무새'(운동해라+앵무새)로서 주변인들에게 달리기를 권한다. 달리기가 얼마나 삶을 살아나게 하는지는 새로 돋아난 잎처럼 빛나는 그의 얼굴이 증명한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언제나 불안했어요. 체중, 인정 욕구, 타인의 시선…그리고 하이힐에 대한 욕망.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하이힐을 모두 버렸고 여유가 생겼어요. 그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중간 강도의 운동을 30분 이상 지속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리다가 눈물이 난 적도 있는데 그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0km라고 하면 너무 멀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그걸 뛰려면 일단 한 걸음을 떼어야 하고 그 걸음이 모여서 결국 10km가 되는 거니까요. 막상 뛰어보면 관념적으로 생각한 것보다 멀지 않아요. 인생에서 많은 일들은 일단 하다 보면 이룰 수도 있다는 것, 다만 성실하게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 요행이나 운으로 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때그때 최선밖에는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돼요.”
이씨는 "체력이 다정"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고 있다고 전한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작업실 옥상으로 초대해 직접 기른 채소로 이런저런 요리를 마법처럼 펼쳐놓는 그를 보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희망. 정말이지 오월에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말이다. 이 달리기 좋은 계절, 작은 길과 강을 따라 달리면서 희망을 '줍줍'하고 싶다. 왼쪽 주머니 속 우울을 서둘러 던져버리지 않고 오른쪽 주머니에 파란 희망, 깜장 희망, 찢어진 희망을 주워 넣으면서 그냥 조금만 더 달려보고 싶다. 그러고는 돌아와 주머니를 뒤집어 까서 친구들 손에 쥐여주고 싶다. "이것들 좀 봐. 정말 아름답지 않니. 오늘 나랑 같이 주우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