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깃장 놓는 터키, 발목 잡는 헝가리… 사분오열 유럽

입력
2022.05.17 19:00
16면
헝가리, EU의 러産 원유 금수 조치 반대
터키, 스웨덴·핀란드 나토 가입 반대키로
회원국 만장일치 못하면 실패로 돌아가
푸틴 '에너지 협박’에 EU 제재 화력도 '뚝'

대(對) 러시아 압박을 두고 유럽이 사분오열하고 있다.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똘똘 뭉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국익을 앞세운 터키와 헝가리의 ‘딴지 걸기’로 유럽의 정치ㆍ군사동맹에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에 회원국들이 동요하면서 유럽연합(EU)의 제재 화력도 약해지는 분위기다.

16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러시아의 숨통을 조이려는 유럽의 단일대오에 균열이 일고 있다. 당장 러시아의 ‘자금줄’인 원유를 겨냥한 제재 조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날 호세프 보렐 EU 외교정책 대표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가 끝난 뒤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EU는 이달 초 6개월간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고, 내년 1월까지 석유제품까지 수입을 끊는 ‘6차 제재안’을 마련했다. 원유수출이 러시아의 가장 큰 수입원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나온 제재 중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헝가리가 발목을 잡았다. 헝가리는 원유 수입의 65%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는 만큼, 거래를 끊을 경우 막대한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EU가 수입 중단 보상금 8억 유로(약 1조 원)를 지원하면 생각해보겠다'는 요구도 덧붙였다. 사실상 금수조치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풀이됐다. EU 차원의 제재는 27개국 회원 전부의 동의가 필요한 까닭에, 헝가리가 계속 ‘어깃장’을 놓을 경우 합의는 무산된다. 미국과 영국이 이미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를 시행한 것과 대조적이다.

러시아의 위협 현실화에 맞서 군사적으로 뭉치려는 움직임에는 터키가 찬물을 끼얹었다. 이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가입에 찬성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명분은 두 국가의 테러 조직 지원이다. 터키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쿠르드족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에 우호적인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내년 재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지자를 결집시키기 위해 해묵은 문제를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이려면 기존 30개 동맹국의 만장일치 승인이 필요한 나토 규정 탓에 터키가 끝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두 국가의 나토 가입은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EU의 대러 제재 대열에서 국가 간 이견이 노출된 상황에서, 군사동맹마저 엇박자를 내고 있는 셈이다.

EU의 제재 수위마저 내려갔다. 이날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에 대러 제재를 위반하지 않고 러시아 가스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새 지침을 보냈다”고 밝혔다. 새 지침은 EU 에너지 기업들이 러시아에 원유 대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산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거나 국영 가스프롬방크 계좌를 통해서만 유로화나 달러로 결제할 수 있게 하자, EU는 회원국에 “러시아 요구에 응할 경우 대러 제재 위반”이라고 엄포를 놨다. 하지만 이날 새 지침에는 가스프롬방크 계좌 개설 등을 허용, 사실상 푸틴 대통령의 의도대로 흐르게 됐다.

EU의 ‘변심’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 회원국의 반발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스 공급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제재 수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EU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유럽 국가들이 매일 가스와 석유 구입을 위해 수백만 유로를 러시아에 지불하고 있다”며 “이 자금은 러시아가 무기를 사고 잔혹행위를 하는 데 사용된다”고 꼬집었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