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보다 숲길, 집보다 정원… 청태전 찻잔에 무르익은 봄

입력
2022.05.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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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장흥 유치면 보림사와 장흥읍 무계고택

따사로움이 무르익어 한낮의 햇살이 자꾸만 부담스럽다. 때맞춰 녹음이 우거지고 서늘한 그늘이 짙어가니 계절의 조화가 오묘하다. 전남에서도 남쪽 끝자락 장흥 보림사를 찾았다가 숲에 반했다. 비자림 숲길을 산책하다 차밭에 빠졌다. 그 차 한 잔 마시려 다원에 들렀다가 고택보다 오래된 정원에 매료됐다. 절보다 멋들어진 숲, 집보다 환상적인 정원, 장흥의 녹색 쉼터로 간다.


절보다 숲, 보림사 비자림과 차밭

온라인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보림사’라는 사찰이 전국에 40개가 넘는다. ‘원조’라 주장하는 식당이 워낙 많아 옥석을 가리기 힘든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래도 ‘진짜’를 꼽으라면 장흥 유치면에 위치한 ‘가지산 보림사’가 으뜸이다.

이 절을 소개하는 글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가 ‘동양 삼보림(三寶林)’이다. 인도와 중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선종 불교의 본산이라 자랑한다. 장흥 보림사는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은 아홉 산문, 즉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이다. 신라 헌안왕 4년(860)에 보조 선사가 창건했다. 한때 88개의 전각을 갖춘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순천 송광사의 말사다. 이곳 가지산은 빨치산의 은거지였다. 보림사의 전각도 한국전쟁 중 전소됐다.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그 이후에 세운 것이다.



보림사도 창건 당시엔 깊은 산중이었겠지만 지금은 절간 담장 앞까지 차로 갈 수 있다. 대찰의 풍모는 넓은 절터로 확인된다. 절 마당이 광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넓고 휑하다. 마당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약수터가 자리 잡았다. 사각의 샘터에서 솟아나는 물이 맑고 차다.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는데, 송사리가 헤엄치고 다슬기도 보인다. 청정수에만 서식하는 어종이라니 오히려 수질을 보증하는 징표다. 1980년 한국자연보호협에서 ‘한국의 명수’로 지정해 ‘보림약수’로 불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는 와중에도 보림사의 석물과 철물은 화마를 피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국보로 지정돼 있고, 보조선사탑과 탑비, 동승탑과 서승탑이 보물 목록에 올라 있다. 건물 규모만 따지면 대웅전이 으뜸이지만, 문화재적 가치는 비로자나불이 안치된 대적광전이 앞자리다. 2기의 삼층석탑과 석등도 대적광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문화재 부자지만 보림사는 따로 주차료나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속된 말로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절이다.



수수한 절 인심은 뒤편 비자림으로 이어진다. 150~300년 된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넓은 절터를 감싸고 있다. 비자나무는 온대지역에서 자라는 상록수로 탄력이 좋아 건축, 가구, 조각 재료로 많이 쓰인다. 특히 잘 갈라지지 않아 최고의 바둑판 재료로 대접받는다. 숲에서는 피톤치드 못지않게 테르펜이 많이 분출된다고 한다. 살균과 살충 효과가 뛰어나 향료나 의약품 재료로 쓰이는 성분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비자림 산책로로 이어진다. 일렬로 가지런하게 정돈된 숲길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숲의 매력은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랐지만 배치는 규칙이 없다. 비자나무 사이에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노각나무 참나무 등이 섞여 있다.




간간이 햇볕이 드리우는 바닥은 온통 차나무로 덮여 있다. 산책로 역시 차나무를 관리하고 수확하기 위한 작업 통로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로 좁고, 쉬어갈 벤치도 두어 군데 놓였을 뿐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는 장흥이 자랑하는 ‘청태전’의 원료로 대접받고 있다. 숲은 비자림이지만 주인공은 차나무인 셈이다. 숲길의 명칭도 '청태전 로드'다. 산책로는 가지산(510m) 정상까지 연결된다. 그러나 보통은 사찰 뒤편을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를 걷는다.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양보다 질이다. 위아래로 짙은 녹색 기운을 내뿜는 길이다.

청태전 차맛을 보기 위해 장흥읍 억불산 자락에 있는 ‘평화다원’을 방문했다. 장흥에는 보림사 외에도 관산읍, 안양면, 용산면 등에 야생 차밭이 대여섯 군데 더 있다. 야생 차는 재배하는 차에 비해 새순이 특히 가늘고 보드라운 것으로 평가된다. 인근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은 보림사 찻잎을 머리카락에 비유했다.

재료는 오직 찻잎 한 가지지만 차에 대한 명칭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발효 정도에 따라 녹차 황차 홍차로 구분되고, 모양에 따라 달처럼 동그란 월단차, 벽돌처럼 네모난 전차가 있다. 청태전은 모양과 색깔을 모두 품고 있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엽전을 닮았다 해서 돈차라고도 불린다. 청태(青苔)는 푸른 이끼를 가리킨다. “청태전은 시루에 찐 찻잎을 절구에 찧어 모양을 잡는데, 이때 바다 이끼인 김이나 파래처럼 푸른 기운이 감돌아요. 아마 거기서 유래한 명칭이 아닐까 싶습니다.” 21년째 청태차를 만들어 판매하는 김수희 평화다원 대표의 해석이다.


줄에 꿰어 말리는 과정에서 청태전은 지속적으로 발효된다. 옛날에는 오래 보존할 수 있어 차보다 약으로 더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말린 청태전은 우리기 전 화롯불에 한 번 굽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하면 이물질이 제거되고, 고소한 맛이 한결 살아난다고 한다. 보이차와 달리 첫 번째 우린 물도 버리지 않는 비결이다. 청태전은 100도로 팔팔 끓인 물에 3~4분 우리거나, 주전자에 5분가량 끓여서 마신다.

고택보다 환상적인 정원, 장흥 고씨 무계고택

평화다원 옆에 집보다 정원이 더 멋들어진 무계고택이 있다. 조선 철종 3년(1852) 고재극씨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의 역사는 170년이지만 이 집안의 내력은 고려시대 제주 고씨의 후손 고중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왕을 호위한 인연으로 호종공신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고, 장흥 고씨의 중시조가 된다. 백(伯)은 공민왕 때 둔 오등작 중 셋째 작위다.

10세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고경명이 있고, 그의 7대손 고석겸이 정화사(淨化寺)라는 암자를 구입해 정화사(淨化舍)를 신축한 것이 무계고택의 시작이었다. 차 마시는 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긴 불가의 가르침,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 곳이었으니 청태전과도 무관치 않은 셈이다.


주변을 관리하고 정원을 가꾸는 일은 집안의 내력으로 전승됐다. 고택의 명칭인 ‘무계(霧溪)’는 한참 후손인 고영완(1914~1991)의 호다. 일본에 유학한 법학도였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후 종가를 지키는 데 헌신했고, 2대와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현재는 그의 아들 고병선(86)씨가 거주하고 있다. 담장 안으로 발을 들이는 건 조심스럽지만, 바깥 정원은 마을의 일부처럼 항상 개방돼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백 년 자란 수목이 환상의 시간을 선물한다.

먼저 눈길을 잡는 것은 인공 연못 송백정(松柏井)이다. 정자가 아니라 샘이다. 한쪽 귀퉁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맑은 물이 연못을 한 바퀴 돌아 아래에 있는 논바닥을 적신다. 연못 안 작은 섬에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향나무, 꽝꽝나무 등이 심겨 있다. 연못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군락을 이루었고, 애기단풍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지난주 수면에는 막 떨어지기 시작한 철쭉 꽃잎이 점점이 떠다니고 있었다. 연못은 조성 당시 ‘정담(靜潭)’이라 불렸다고 한다. 정지된 듯 고요하게 물이 움직인다. 7월 말부터 두어 달은 진분홍 배롱꽃이, 가을이면 별처럼 반짝이는 단풍잎이 떨어져 또 꿈결 같은 풍광을 선사할 것이다.






연못에서 뒤로 돌면 고택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좁은 통로 양쪽으로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가 담장을 휘감아 하늘을 뒤덮었고, 그 바깥에는 맹족죽이 발처럼 드리워져 있다. 몇몇 나무는 밑동 지름이 1m가 넘는 거목이다. 집의 나이보다 오래된 듯하다. 관광객을 불러모으기 위해 조성하는 요즘 정원에 비하면 규모가 턱없이 작지만, 풍경만큼은 환상적이고 옹골차다. 되도록 주변 환경을 해치지 않고 가꾸고자 한 고씨 집안의 노력이 돋보인다.

무계고택과 송백정 일원은 최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내비게이션에는 아직 등록돼 있지 않다. ‘고영완가옥’으로 검색하면 찾아갈 수 있다.




무계고택에서 가까운 억불산 중턱에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수령 40년이 넘은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에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한옥 등의 숙박시설과 목공 및 생태건축 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숲 상부 덱 산책로의 운치가 그만이다. 지그재그로 서서히 오르는 길 양편으로 편백나무와 황칠나무가 섞여 자라고, 초록으로 덮인 바닥에는 폭포소리가 요란하다. 청아한 새소리까지 더해지면 잠시 열대 우림 속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장흥=글·사진 최흥수 기자